손택수 / 지게體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지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

21/0104
외국시 / 메리 올리버 -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아침에 바닷가로 내려가면 시간에 따라 파도가 밀려들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지, 내가 하는 말, 아, 비참해, 어쩌지― 나 어쩌면 좋아? 그러면 바다가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21/0104
황동규 / 겨울을 향하여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집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생각...

21/0104
시인의 말 / 마종기 - <하늘의 맨살> 문학과 지성사. 2010년

시집 뒤 표지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정박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는 20대에 무작정 떠났다. 너무 멀리 왔나 싶었는데 사람 구실 핑계로 세월을 탕진하고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서울 친구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놀리는, 악어와 물새와 도마뱀과 원색의 꽃이 침묵 속에...

20/0730
시인의 말 / 김소연 -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 지성사. 2009...

시집 뒤 표지글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이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그러곤 말로 뱉진 못했지만, 나는 이 말을 하고 있...

20/0730
시인의 말 / 김선우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 ...

시집 뒤 표지글 시를 짓는다, 시를 받는다고도 말한다. 시와 논다고도 하고, 시에게 나를 빌려준다고도 한다. 나는 그냥 시를 쓴다고 말한다. `쓴다'고 말할 때, 시 쓰는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넓고 거친 격랑 속이다. `쓴다'의 거리감 속에는 섣부른 신비가 개입하지 않아서 좋다. 쓰는 주체...

20/0730
시인의 말 /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1988. 11) 오...

20/0730
시인의 말 / 황지우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시를 피했다. 다시 꺼내보니 그 중에는 8년이 넘은 것들도 있다. 그 동안 잘 놀았다.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지난 여름 혼자 미케네 城성을 올랐다. 아가멤논 왕이 살해되었던 메가라를 한참 촬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혹한 지중해 햇살에 대해 우산을 펴고 있...

20/0730
시인의 말 / 김윤이 - <독한 연애> 문학동네. 2015년

누구나 자신과 타인의 부재를 존재의 상태로 전환시키는 연인의 형상을 꿈꾼다. 나 역시도 이런 사랑의 자장에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 얼마나 천문학적 넓이의 규모를 가지는 아리땁되...... 무섭고도 슬픈 말인가. 사랑의.....존재. 나는 이제 만인에게 사랑받는 연인을 원하지 않는다. 상처만이 상처를 주는 ...

20/0730
시인의 말 / 이성복 - <남해 금산> 창작과 비평사. 1989년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

20/0730
시인의 말 / 이진우 - <보통 씨의 특권> 시인동네. 2015년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마주서서 손을 모읍니다. "나마스테,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감사합니다." 두 사람 안에 사는 신이 두 사람에게 한 목소리로 인사합니다. "당신이 나이고, 생명이고, 희망입니다." 당신이 나, 내가 당신. 우리는 하나가 낳은 하나. "나마스테, 내 안에 있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20/0730
시인의 말 / 최정례 -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작과 비평사....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상한 날들이다. 무사태평처럼 보이는 일상의 안달복달이 반복된다 날아간다. 와중에 꾸려가고 있는 생각들도 자꾸 변형되면서 이게 시냐, 산문 아니야? 묻는다, 쓴다는 게 뭔가? 흩어져 있다가 꿈틀거리고 결합하기도 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것, 나가지 못하게 하고 꼼짝없이 나를 붙들...

20/0730
시인의 말 / 나희덕 -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06년

예술은 가장 하찮은 잎사귀라고 말한 작가가 있었다. 가장 새로운 것은 언제나  가장 작은 법이기에. 그렇다. 도무지 싹이 돋을 것 같지 않은 민둥가지를 뚫고 시가 숨은 눈 속에서 움트곤 하지 않던가. 그리고는 어느새 무성해져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지 않던가. 1997년 가을에 나왔던 시집을 7...

20/0730
시인의 말 / 정호승 - <밥값> 창작과 비평사. 2010년

신작시집으로 열번째 시집을 낸다. 세상에는 가도 되는 길이 있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 침묵의 절벽 끝에 한 채 서 ...

20/0730
시인의 말 / 박재연 - <쾌락의 뒷면> 천년의 시 2009년

시를 쓰기 전에는 내가 나를 몰라 내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우왕좌왕 살았다 내 안의 나는 만나보니 낯설고 반가워라 지금부터 사귀자 겨우19살에 `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고 일갈한 랭보보다는 ` 시 쓰는 것은 여러 해 기다려 오랜 세월 깊이와 향기를 모아서  써야 한다'는 릴케...

20/0730
손택수 /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

20/0730
손택수 /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레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

20/0730
손택수 /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

20/0730
손택수 / 대숲, 되새떼

대숲 위에 되새떼가 와서 운다 너도 뼈가 비었니 나도 비었단다 대나무들, 더는 뻗어 올라갈 수 없는 마디 끝에 새들의 뼈가 이어진다 마디마디 이어진다 대마디 몇을 더 뽑아올린 새, 울음이 댓잎처럼 돋아난다

20/0730
손택수 /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배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 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리는 상...

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