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정끝별 / 두 문 두 집

네게 닿고 싶어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짚단이 되고 싶어 눅눅한 배꼽 감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선 문이 있어야, 나그네 집처럼 사막에 선 모래집이 말했어 그만 가고 싶어 탯자리를 향해 행렬짓는 늙은 코끼리처럼 남아프리카 케냐 어디쯤 페루의 새처럼 남아메리...

16/0131  
정끝별 / 우리 집에 온 곰

흰 눈을 이글루처럼 뒤집어 쓴 채 닻 같은 앞발톱으로 베란다 창을 긁고 있었어 두 눈을 流氷처럼 끔벅거리며 집에 들어가도 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안돼! 그렇게 앞발에 힘을 주면 아파트가 무너져 안돼! 그렇게 큰 몸으로는 들어올 수 없어 몸을 줄여야 해 그래 좋아 3층만 해졌구나 먹을 ...

16/0131  
정끝별 / 동요動搖

상영아 달 따러 가자 갓 쪄낸 콩가루 시루떡 같은 달이 뜰 때 튼튼한 느티나무 밑에 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느티나무 그물 가지가 달을 건져줄지 몰라 어쩌면 달콤한 바나나 같은 달이 뜰 때 사다리에 사다리를 이어 올라가고 올라가면 한 손으로 달을 잡을 수 있을지 몰라 그래 그래 오리처럼 뒤뚱뒤뚱...

16/0131  
정끝별 / 지나가고 지나가는 1

지나간다 한 사람 참 밤나무 꽃을 지나 벌써 너도 밤나무 열매와 나도 밤나무 그늘을 질러 지나간다 눈물샘 밑 한갓진 공터를 돌아 오래 지나온 길을 더듬어가는 뒷골목에는 까악 깍 까치 집도 있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길 아니다 한 사람 집은 없다 지나가는 청춘인가 싶은 저 폐허에게 지나가는 비...

16/0131  
정끝별 / 더럭 터럭

먹이가 들어가는 모든 입구에는 터럭이 없다 입이건 주둥이건 부리건 아가리건 터럭이 없다 먹이가 닿는 모든 부분에는 터럭이 없다 손바닥이건 발바닥이건 뱃가죽이건 터럭이 없다 따오기류에는 머리에 터럭이 없는 놈들이 많다 진흙탕이나 개펄에 머리를 박고 먹이를 구하기 때문이다 흰깃독수리나 콘도...

16/0131  
정끝별 / 사랑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 길 맘 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石筍)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 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16/0131  
정끝별 / 흰 책

흰 자모음들이 두서없이 휘갈겨대는군요 바람이 가끔 문법을 일러주기도 합니다 아하 千軍萬馬라 써 있군요 누군가 백말떼 갈기를 마구 흔들어대는군요 희디흰 말털들이 부지런히 글자를 지우네요 아이구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떼떼로 몰려오는군요 흰 몸이 흰 몸을 꼭 붙들고 자면 사랑을 낳듯 흰 ...

16/0131  
정끝별 /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지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

16/0131  
정끝별 / 철로에 갇힌 사나이

철로가 보인다, 조롱받는 노쇠한 말처럼 고개를 떨군 한 사나이가 걷고 있다 드문드문 몇 그루 미루나무 풀더미 무성한 침목을 따라 한 사나이 이제 소용이 닿지 않는 철로를 간간이 두드려보며 바스락 바스락 흘러가고 있다 그 철로 또한 달리며 견주고 추월했던 적 있다 그러나 결국 끊긴 채 폐쇄되...

16/0131  
정끝별 / 엘리스, 데려다줘요

아하, 그러니까 푸른 바닷속 인어처럼 물고기처럼 물살 따라 하얀 물방울로 얘기하고 두 겨드랑이로 숨쉴 수 있다면 산호 숲 해초처럼 우리 함께 살랑일 수 있다면 좋겠네 그러면 그곳에는 공화국도 시민도 돈도 이데올로기도 언어도 말도 없고 그러니까 옷도 없으니까 풀잎같이 아니아니 미역같이 ...

16/0131  
정끝별 / 으름이 풍년

쩍 벌어진 으름 씨는 새가 먹고 굴러 떨어진 헛이름은 개가 먹고 갓 벌어진 주름은 내가 먹고 군침 흘리던 해어름 먹구름은 나와 개와 새를 으르며 붉으락 붉으락 으름장을 펼쳐놓고 아뿔싸 입에 쩍쩍 들러붙은 가을 게으름이라니! 음 물큰한 처음 졸음처럼 들척지근한 죽음 음음 잘 익은 울음 오랜 으...

15/0926  
정끝별 / 달의 행로

모든 테두리 뒤편엔 해가 있고 어둠의 둘레엔 빛이 있습니다 내 뒤엔 늘 당신이 있었고 내 둘레엔 마른 소금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내 뒤를 껴안을 때 그건 일식 내 전신을 투신해야 하는 테두리만을 남기고 당신은 내 뒤편에 숨고 마는 당신과 내 인력의 최대치에서 남아도는 테두리가 비등점의 ...

15/0308  
정끝별 / 밤의 발목들

세살배기가 제 그림자를 보고 놀란다 도망치려 달리다 서다 뒷걸음치다 제풀에 지쳐 발아래를 손가락질하다 울음을 터트린다 아가는 아직 미래를 알지 못해서 아가는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아서 길에 들어선 자는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진창이든 허방이든 마다하지 않고 순풍이든 역풍이든 떠밀리지 않고 뒷...

15/0308  
정끝별 / 꽃들의 만(灣)

첫꽃은 첫꽃의 의지대로 끝꽃은 끝꽃의 의무대로 꽃이란 미래의 기억이라서 지나가는 소음이라서 갓 돋은 잎을 내모는 바람의 궤도는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꽃이란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 차가워지는 것 그리고 말라가는 것 오가는 추(錘)처럼 계절에 들고 스치는 시침과 분침처럼 계절을 나라했...

13/0424  
정끝별 / 상강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깔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13/0123  
정끝별 / 옹관甕棺 1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를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

12/1117  
정끝별 / 추억의 다림질

장롱 맨 아랫 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 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

12/1101  
정끝별 / 까마득한 날에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12/0827  
정끝별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

12/0827  
정끝별 / 불선여정不宣餘情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남은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 속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같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

1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