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신경림 / 늙은 소나무 - 밀양에서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11/0130  
함민복 / 칠석

달빛 내 리 고 장독대 정 안 수 한 사발 어 머 니 아, 저것이 美信이다

12/0715  
나희덕 / 물소리를 듣다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며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자? ......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17/0212  
천상병 /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07/0731  
박경리 / 일 잘하는 사내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 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 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

13/0424  
외국시 / 파블로네루다 / 산책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始原과 재의 물위를 떠다니는 펠트 백조처럼.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

19/0109  
강은교 / 장날

장날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알사탕이 오색의 무지개를 뻗치고 있는 리어카 옆에는, 빛나는 무우 눈부신 시금치, 한 곳에 가니 물고기들이 펄떡펄떡하고 있었다, 거기 돛폭 같은 지느러미 윤기 일어서는 살에선 바다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연 눈동자가 잔뜩 기대에 차서 장날을 내다보고 ...

16/0131  
외국시 / 울라브 하우게 / 노시인이 시를 쓰네

노시인이 시를 쓰네 행복하도다 행복하도다 샴페인 병처럼 그의 내부에서 봄(春)이 기포들을 밀어 올리니 병마개가 곧 솟아오르리.

17/0610  
신경림 / 새벽 이슬에 떠는 그 꽃들

오래 전에 잊혀진 고도 허물어진 성문 아래 좌판을 차리리 금잔화와 맨드라미와 과꽃 씨앗 몇 봉지 놓고. 진종일 기다리면 먼데 사는 두메 늙은이 하나 찾지 않으랴. 풍습도 말도 늙은이의 손에 들린 꽃씨를 좇아 나도 가야지 낡은 내 몸에서 시원스레 빠져나와서. 절뚝이는 늙은이의 그...

09/0206  
강은교 / 그 소녀

그 소녀를 또 보았다, 실에 끌려가는 아이처럼, 부끄럽게 살살살살 비단 손수건이 대리석 바닥에 쓸리듯, 꽃 무늬자수가 팔랑개비 날개에 수놓아지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밀납종 같은 젖을 달랑거리며 등뼈를 잔뜩 구부린 채, 그곳은 오른편 손으로 가리고 운명처럼 간병인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 ...

17/0212  
함민복 / 산이 난다

큰 새들의 날개는 산을 닮았다 기러기가 날아올 때 선(線)으로 된 산도 함께 날아온다 갈매기가 머리 위를 지날 때 면(面)으로 된 산도 지난다 산이 운다 울며 날아가는 산(山)아! 사람들이 서로 껴안을 때 사람들의 팔도 산모양인 것 너희들도 보았느냐

13/0426  
도종환 / 내 안의 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빚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 ...

12/0712  
손택수 /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를 하던 그가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 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꼽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

12/1227  
서정윤 / 나의 어둠을 위한 시

1. 원죄의 업      어둠으로 솟아나는 밤은   우리들이 가지는 큰 위안   서둘지 않은 노을로   하루는 가고   꿈을 털며 가는 사람에게   그림자마저 떠나 버리면   목마른...

09/1105  
도종환 / 해인으로 가는 길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

11/0903  
신경림 /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산비알에 돌밭에 저절로 나서 저희들까지 자라면서 재재발거리고 떠들어쌓고 밀고 당기고 간지럼질도 시키고 시새우고 토라지고 다투고 시든 잎 생기면 서로 떼어주고 아픈 곳은 만져도 주고 끌어안기고 하고 기대기도 하고 이렇게 저희들끼리 자라서는 늙으면 동무나무 썩은 가질랑 슬쩍 잘...

08/0609  
손택수 / 쥐수염붓

왕희지와 추사가 아꼈던 붓이다 족제비나 토끼털로 만든 붓도 있지만 그 중에도 으뜸은 쥐수염붓 놀라지 마라, 명필들은 쥐 수염 중에도 배 갑판 마루 아래에 사는 쥐에게서 가장 상품의 붓이 나온다고 믿었단다 배가 삐걱거릴 때마다 수염을 쫑긋거리는 쥐 파도가 치는 대로 머루알 같은 ...

12/0712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쑥대머리 장단이 한바탕 지나간 뒤 육십대 여자 나와 아니리조로 사설)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 한 대목 조선 여자 환갑이믄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나이라지만 내가 오늘날 어떤 여자간디 이 풍진 세상에 나와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똥배짱으루 사설 한 대목 늘어놓는가 연...

12/0625  
외국시 / 라이너 쿤체 / 늙어

땅이 네 얼굴에다 검버섯들을 찍어 주었다 잊지 말라고 네가 그의 것임을

19/1109  
황지우 / 비닐새

흐리고 바람 부는 날 언덕을 오르는 나에게 난데없이 대드는 흰 새를 나는 쌱 피했다 피하고 보니, 나는 알았다, 누가 버린 農心 새우깡 봉지였다 칠십세 이하 인간에게 버림받은 비닐새, 비닐새여 내 마음을 巡察하는 흰 새여 흐리고 바람 마음대로 부는 날의 언덕은 이 세...

08/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