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나태주 / 말년

펜과 종이와 돋보기 쓰다가 읽다가 졸다가 말이 없다가 창 너머 먼 산 바라보며 너를 기다리다가.

21/0206  
문태준 /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

21/0206  
최문자 / 그해의 꽃구경

그해 그를 생으로 뽑아낼 수 없어서 생으로 사랑니 하나 뽑아내고 치통을 견디다 못해 꽃구경을 갔었다. 토종 흰 민들레 군락지, 제천 구인사 한꺼번에 피를 다 쏟아낸 듯한 핼쑥한 꽃들이 어금니가 보이도록 희게 웃고 있었다. 엎드려서 흰 꽃 두 송이 꺾는 사이 피가 한입 가득 고였다. 흰 꽃 위에...

21/0206  
황동규 / 시가 사람을 홀리네

매일 같은 방향에서 머리 내미는 게 지겹다고 둥근 해 서녘에서 뜨는 일 없고 산책길 언덕 꽃들이 모여 수다 떨다 서로 냄새 바꾸는 일 없지만, 늘 뽑는 시의 맛 조금만 맥없이 뽑아내도 싱거운 천이라고? 가을꽃들도 비 개면 다들 전보다 더 튀는데 시인이여, 시의 무늬를 짤 때 탁탁 튀게 짜시게. ...

21/0206  
황동규 / 밟을 뻔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마스크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그만 풀꽃 둘이 시...

21/0206  
손택수 / 지게體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지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

21/0104  
외국시 / 메리 올리버 -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아침에 바닷가로 내려가면 시간에 따라 파도가 밀려들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지, 내가 하는 말, 아, 비참해, 어쩌지― 나 어쩌면 좋아? 그러면 바다가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21/0104  
황동규 / 겨울을 향하여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집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

21/0104  
손택수 /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

20/0730  
손택수 /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레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

20/0730  
손택수 /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

20/0730  
손택수 / 대숲, 되새떼

대숲 위에 되새떼가 와서 운다 너도 뼈가 비었니 나도 비었단다 대나무들, 더는 뻗어 올라갈 수 없는 마디 끝에 새들의 뼈가 이어진다 마디마디 이어진다 대마디 몇을 더 뽑아올린 새, 울음이 댓잎처럼 돋아난다

20/0730  
손택수 /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배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 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리는 ...

20/0730  
손택수 /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 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로 드리우고 그물을 끄집어 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20/0730  
손택수 / 폭포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 얼얼하도록 매를 맞...

20/0730  
손택수 / 진흙길

길이 착 달라붙는 느낌, 뭐랄까 내 발이 무슨 나무뿌리라도 되는 줄 아나 나를 땅속에 아주 심어두겠다는 심사로 길 깊숙이 발을 끌어당겼다가 빼려고 하면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진절머리 말 마라 그런 여자가 나는 차라리 그리운가 보다 바지가랑이 좀 젖는다면 어떠냐 누가 나같은 것을 이렇...

20/0730  
손택수 / 지독한 나무

가만 보니 나무도 독한 데가 있다. 무슨 자해공갈범처럼 가을 들면서 나무는 제 몸에 상처를 낸다.  매달린 나뭇잎을 떨어트리기 위해  쓱싹쓱싹 톱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이 생활이었다고,  생활을 잃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nbs...

20/0730  
손택수 / 부엉이 바위

부엉이가 울었다는 산 부엉이 울음이 바위귀 속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었다는 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침을 놓듯 막힌 혈을 뚫어주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눈 이제 부엉이는 보이지 않는데 부엉이 울음이 다시 들린다 아직 어둠이 다 새지 않았다고 이 어둠을 뭉쳐 한 종지 이슬을 만들어야...

20/0730  
손택수 / 살가죽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컬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들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컬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리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걸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

20/0730  
손택수 / 선운 동백

동백을 까는 건 볕에게 맡겨라 난봉꾼처럼 꽃망울  슬슬  얼러대는 바람에게나 맡겨라 소싯적 나, 동백을 까본 적이 있다 꽃 소식 기다리다 지쳐 쳐들어간 선운사 동구 이러다 어느 세월에 꽃을 다 물들일까, 분단장 하고 손님들 맞을까 감질이 나서 더는 참지 못하고 ...

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