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기형도 / 집시의 시집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

16/0101  
기형도 / 식목제(植木祭)

어느 날 불현 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

09/0330  
기형도 / 새벽이 오는 방법

밤에 깨어 있음. 방안에 물이 얼어 있음. 손(手)은 零下 1度. 문(門)을 열어도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갈대들이 쓰러지는 江 邊에 서서 뼛속까지 흔들리며 강기슭을 바라본다. 물이 쩍쩍 울고 있 다. 가로등에 매달려 다리(橋)가 울고 있다.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땅 위에서 ...

08/1206  
기형도 /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

08/1118  
기형도 /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 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

08/1118  
기형도 / 그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

08/1118  
기형도 / 잎 눈 바람 속에서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나무가 우수수 웃을 채비를 한다. 천천히 피부를 닦 는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살아 있다. 解氷(해빙)의 江...

08/1118  
기형도 / 폐광촌

쉽사리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젖은 이마 몇 개 불빛으로 분별하였다. 밤은 기나긴 정적의 숯으로 우리를 속이려 들었지만 탐조등으로 빗발을 쑤시면 언제든지 두서너 개 은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후에 빗물을 털어버린 시간이 허기의 바람을 ...

08/1118  
기형도 / 나무공

가까이 가보니 소년은 작은 나무공을 들고 서있다. 두 명의 취한 노동자들,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비틀 비틀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젠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의 공기가 약간 흔들린다.  ...

08/1118  
기형도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키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

08/1118  
기형도 / 밤 눈

내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

08/1118  
기형도 / 사강리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좋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가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

08/1118  
기형도 / 종이달

1 과거는 끝났다. 송곳으로 서류를 뚫으며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김(金)을 본다. 자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수백 개 명함들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또한 우리는 미혼이니까, 오늘도 분명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직은 쓸모 있겠지. 몇 장 얄팍한 믿음...

08/1118  
기형도 / 겨울 눈(雪) 나무 숲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

08/1118  
기형도 / 오후 4시의 희망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

08/1118  
기형도 / 비가 2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자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

08/1105  
기형도 / 비가 1

열병은 봄이 되어도 오는가, 출혈하는 논둑, 미나리 멍든 허리처럼 오는가 분노가 풀리는 해빙의 세상 어쩔 것인가 겨우내 편안히 버림받던 편안히 썩어가던 이파리들은 어쩔 것인가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봄은 도둑고양이처럼 산, 들, 바다. 오! 도시 그 깊은 불치의 언저리까지 ...

08/1105  
기형도 / 거리에서

우리가 오늘 거둔 수확은 무엇일까 그대여 하고 물으면 갑자기 地上엔 어둠, 거리를 疾走하는 바람기둥. 그대여, 우리는 지금 出口를 알 수 없는 巨大한 圖畵紙 위에 서 있다. 제각기 하루의 스위치를 내리고 웅성이며 사람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면 都市의 끝에서 끝까지 아픈 다리를 데리고 ...

08/1103  
기형도 /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

08/1025  
기형도 /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

08/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