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김춘수 / 유월에

빈 꽃병에 꽃을 꽂으면 밝아 오는 실내의 그 가장자리만큼 아내여, 당신의 눈과 두 볼도 밝아 오는가, 밝아 오는가, 벽인지 감옥의 창살인지 혹은 죽음인지 그러한 어둠에 둘러싸인 작약 장미 사계화 금잔화 그들 틈 사이에서 수줍게 웃음짓는 은발의 소녀 마아가렛 을 빈 꽃병에 꽃으면 밝아오는 실내...

12/0625  
김춘수 / 나의 하느님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

09/0713  
김춘수 / 찢어진 바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물새들이 울고 간다. 저마다 입에 바다를 물었다. 어디로 가나. 네가 떠난 뒤 바다는 오지 않았다.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아침마다 찾아오던 온전한 그 바다,

09/0706  
김춘수 / 통영읍

도깨비불을 보았다. 긴 꼬리를 단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석고개, 낮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뜨음했다. 시구문에는 유약국이 살았다. 그 집 둘째가 청마 유치환 行而不言(행이불언)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海底(해저)터널 너머 해핑...

09/0302  
김춘수 / 바위

옛날 우리가 술레잡기 하던 곳 술래야, 너는 나를 잡지 못하고 나는 그만 거기서 잠이 들었다. 눈 뜨고 보니 밤이었다. 술래야, 그때 벌써 너는 나를 두고 말도 없이 너 혼자 먼저 가버렸다. 얄미운 술래야,

09/0226  
김춘수 / 비상

새가 날아간 흔적은 없다. 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새를 날려보내고 하늘은 멍청해진다. 누가 보았다고 하는가 새발톱에 맺힌 피,

09/0226  
김춘수 / 초상

햇살 한 톨 땅 위에 떨어진다. 춥고 낯설다.

09/0214  
김춘수 / 강우(降雨)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

09/0204  
김춘수 / 서풍부 西風賦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올려놓고 복사꽃을 올려...

09/0105  
김춘수 / 제25번 비가

꿈에 갈매빛 하늘을 보고 꿈에 샛노란 제비붓꽃을 본다. 나는 얼굴이 환해진다. 나에게는 길몽(吉夢)이다 그것은 내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내 혼자만의 생각은 나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끼고 싶다. 서른여덟 평이 되는 아파트 거실 2인용 쇼파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멍하니 한나절을...

08/1122  
김춘수 / 바람

풀밭에서는 풀들의 몸놀림을 한다. 나무가지를 지날 적에는 나무가지의 소리를 낸다...... 풀밭에 나무가지에 보일 듯 보일 듯 碧空에 사과알 하나를 익게 하고 가장자리에 금빛 깃의 새들을 날린다

08/1103  
김춘수 / 메기

지 입이 훔쳐가, 지 얼굴이 없다니!

08/1102  
김춘수 / 구름

구름은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몇 개 따먹고 [ 아직 맛이 덜 들었군! ]하는 얼굴을 한다. 구름은 흰 보자기를 펴더니, 양털 같기도 하고 무슨 헝겊쪽 같기도 한 그런 것들을 늘어 놓고,혼자서 히죽이 웃어보기도하고 혼자서 깔깔 웃어보기도 하고 어디로 갈까? 냇물로 내려가서 목욕(沐浴)이나 하...

08/1029  
김춘수 / 달맞이꽃

밤 하늘을 기차가 달린다. 집이 덜커덩 덜커덩거린다. 밤에 불 켠 가로등이 쓸쓸하다. 이 時代 땅은 끈끈하고 누군가 징 박힌 구둣발 소리 지나간다. 그 자리 그리스 신화처럼 꽃 한 송이 희부옇게 피어나는가 하더니 얼른 얼굴을 가린다.

08/1029  
김춘수 / 

봄이 와 범부채꽃이 핀다 그 언저리 조금씩 그늘이 깔린다 알리지 말라 어떤새가 귀가 없다 바람은 눈치도 멀었다 되돌아와서 한 번 다시 흔들어 준다 범부채꽃이 만든 (아무도 못 달래는) 돌아앉은 오묵한 그늘 한뼘, 점점점 땅을 우빈다

08/1022  
김춘수 / 모른다고 한다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08/1010  
김춘수 / 유년시 3

그 해의 늦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산다화를 적시고 있다. 산다화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산다화의 명주실 같은 늑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08/0828  
김춘수 / 유년시 2

누군가의 돌멩이를 쥔 주먹이 어디선가 나를 노리고 있다. 꿈속에서도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한껏 노리고 있다. 은전 두 개를 다 털어 나는 용서를 빈다

08/0828  
김춘수 / 유년시時 1

호주 아이가 한국의 참외를 먹고 있다.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만의 여름하늘이 따로 또 있는데 길을 오면서 행주치마를 두른 천사를 본다

08/0828  
김춘수 / 춘일만보春日漫步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바다 밑에 바다가 있고 쟁반 곁에 더 예쁜 쟁반이 있고 속곳을 들춰보니 더 하늘한 속곳이 있고 식탁보는 걷어보니 거기 천사 한 분이 납짝하게 엎드리고 있었다 릴케가 보냈다고 한다. 어떻게 대접을 할까, 프라하에도 곶감과 계피를 꿀물로 달인 수정과가 있을까, ...

08/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