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김용택 / 무슨 말인가 더 드릴 말이 있어요

오늘 아침부터 눈이 내려 당신이 더 보고 싶은 날입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눈처럼 불어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눈송이들은 빈 나뭇가지에 가만히 얹히고 돌멩이 위에 살며시 가 앉고 땅에도 가만가만 가서 내립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가 닿고 싶어...

19/1109  
김용택 / 너그 둘은 이제 어쩔래

개구리들이 운다. 와그르르 운다. 울다가 뚝 그친다. 다 그쳤는데 두 마리는 그냥 계속 운다. 어 어, 너그 둘은 이제 어쩔래.

19/0703  
김용택 / 두꺼비

길가에 두꺼비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꺼비가 눈을 떴다 감았다 합니다. 길 가던 할머니가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합니다. 아가, 잠 오면 어서 집에 가서 자거라.

19/0703  
김용택 / 그대, 거침없는 사랑

별빛 당신 생각으로 당신이 내 마음에 가득 차야 하늘에 별들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을 당신이 없는 지금,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그대, 거침없는 사랑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

19/0109  
김용택 / 슬픔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19/0109  
김용택 / 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날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

19/0109  
김용택 / 선생님도 울었다

오늘은 밤에 학예회를 했다. 그런데, 할머니도 아빠도 안 왔다. 할머니는 콩 타작하느라 안 오고 아빠는 밤에도 공사 일 하느라 안 왔다. 강욱이는 할머니도 오고 엄마도 오고 아빠도 오는데, 나는 한 명도 안 왔다. 연습을 하다가 눈물이 나와 수돗가에 가서 세수를 하며 혼자 울었다. 그때 우리 선...

17/0124  
김용택 / 할머니의 힘

할머니는 울 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울 때도 눈물이 없이 운다. 할머니는 이제 죽을 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랑 산다

12/0909  
김용택 / 농부와 시인

아버님은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집을 지으시고 그 집에 살며 곡식을 가꾸셨다. 나는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11/0803  
김용택 / 봄날

나 찾다가 텃밭에 흙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11/0803  
김용택 / 수양버들

너를 내 생의 강가에 세워두리. 바람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처럼 너는 바람을 타고 네 뒤의 산과 네 생과 또 내 생, 그리고 사랑의 찬연한 눈빛, 네 발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나는 보리. 너는 물을 향해 잎을 피우고 봄바람을 부르리. 하늘거리리. 나무야, 나무야! 휘휘 늘어진 나를 잡고 너는...

09/0906  
김용택 / 깊은 밤

깊은 밤 강가에 나가 담배를 태우다가 마을을 돌아보면 한두 집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마을은 하루도 깊은 밤이 없는 것이다.

09/0905  
김용택 / 우리 아빠 시골갔다 오시면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이건 담장의 호박잎 이건 강 건너 밭의 풋고추 이건 부엌의 고춧가루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맨 나중에는 잘 가라고 손짓하시는 시골 우리 할머니 모습이 따라와요.

09/0601  
김용택 / 눈 오는 집의 하루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또 밥 먹는다

09/0518  
김용택 / 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09/0508  
김용택 / 능소화

꽃 졌다 능소화 진다 한낮 불볕 속 깊이 살을 파는 생살의 뜨거움 피가 따라 흐른다 우지 마라 말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도도해져서 산처럼 서다

09/0430  
김용택 / 짧은 이야기

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사과는 서러웠습니다 서러운 사과를 사람들만 좋아라 먹습니다

09/0428  
김용택 / 눈이 오면 차암 좋지?

눈이 오면 좋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하얀 색으로 펑펑 내려오는 것 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지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설레기도 하고 캄캄하게 잃어버린 어린 날들이 환히 불켜지기도 해 턱을 고이고 앉아 아주 천천히 지상으로 하염없이 내려오는 눈송...

08/1206  
김용택 / 그 해 그 겨울 그 집

지금도 나는 그 집에서 살지만 그때 그 집이, 그 눈 오는 집이 이따끔씩 또렷하게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밤이 빨리도 찾아오는 산속 마을에 며칠간이고 눈이 내리면 밤마다 산노루가 산을 헤매이며 울다가 마을 뒤안까지 내려와 바스락거리고 부엉이는 부엉부엉 울었다 배가 고팠던 것일까...

08/1202  
김용택 / 오늘

오늘은 고개 떨구고 마음의 끝을 보며 한없이 걸었습니다 어디나 해가 지고 어둑 어둑 저물어 자욱하게 드러난 저문 길로 하얀 꽃들이 지나갔습니다 마음이 갈 데 없어 마음이 무거워 발길은 정처없고 내 발자국소리가 내 발자국소리를 따라오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08/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