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김수영 / 나의 가족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렀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

19/0307  
김수영 /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2/0704  
김수영 /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

12/0704  
김수영 / 은화隱畵

인적 없는 습지에 갔다. 수초 무성한, 깊은 곳에 잠이 없는 큰 메기가 살 것 같은 습지. 잿빛 왜가리가 탁한 물속을 보고 있다. 물이 흐르는 쪽으로 굽은 그림자, 외다리로 선 발목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것들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 단단한 바닥이 된다...

12/0704  
김수영 /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와 나 사이에 세상이 있었는지 세상과 나 사이에 네가 있었는지 너무 밝아서 나는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결코 너를 격하고 있는 세상에게 웃는 것은 아니리 너를 보고 너의 곁에 애처로울 만치 바싹 다가서서 내가 웃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12/0704  
김수영 /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

12/0704  
김수영 /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

12/0704  
김수영 / 밤의 이야기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는 저 그림자들.울타리 너머 내가 잠든 장짓문을 단숨에 열고 들어와 밤마다 내 숨결을 훔치고 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버릴 때의 무서움. 이불을 덮고 누운 턱이며 목 뺨 언저리를 핥는 저 숨결에 오금이 저릴 무렵, 내 몸은 가볍게 저 밤 하늘로 올라가 내 집이며 우물...

12/0704  
김수영 / 달 밤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찹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달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

12/0704  
김수영 / 백지白紙에서부터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四月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老朽의 美德...

12/0704  
김수영 / 하...... 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모양으로 사 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

12/0704  
김수영 / 금성(金星)라디오

金星라디오 A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5백원인가를 깍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 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

12/0704  
김수영 / 꽃잎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12/0704  
김수영 /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

12/0704  
김수영 / 미스터 리에게

그는 재판관처럼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구제의 길이 없는 사물의 주위에 떨어지는 태양처럼 판단을 내린다 ---- 월트 휘트먼 나는 어느 날 뒷골목의 발코니 위에 나타난 생활에 얼이 빠진 여인의 모습을 다방의 창 너머로 별견(瞥見)하 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미스터 리한테 적...

12/0704  
김수영 / 구름의 파수병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詩)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12/0704  
김수영 / 사무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아무 목적 없이 앉았으면 어떻게 하리 남이 일하는 모양이 내가 일하고 있는 것보다 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웁게 보이면 어떻게 하리 일한다는 의미가 없어져도 좋다는 듯이 구수한 벗이 있는 곳 너는 나와 함께 못난 놈이면서도 못난 놈이 아닌데 쓸데없는 도면 위에 글...

12/0704  
김수영 /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비가 그친 후 어느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드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12/0704  
김수영 / 기도 - 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붙이는 노래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

12/0520  
김수영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1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