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허수경 / 입술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

19/1008  
허수경 / 운수 좋은 여름

테러리스트가 내일 지난 길을 오늘 걸어서 납치당하지는 않았다 지진이 난 도시의 여관에 한 달 후에 자지 않아서 내가 잠잔 여관이 폭삭 내려앉는 것을 텔레비로 볼 수도 있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아, 이대로 이 금빛 들판, 떠나도 괜찮겠다 했다 어디 다시 도착해도 좋겠다 했다 천지간, 그 사이에서...

19/1008  
허수경 / 불취불귀(不醉不歸)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

19/1008  
허수경 / 별을 별이

별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고 칼로 별을 도려낸 흔적을 가진 이도 있고 그 흔적을 개조해서 무덤으로 만든 이도 있고 공중에 별을 걸어놓고 벌집을 만든 이도 있지만 별로 밥을 먹거나 별을 살 속으로 깊이 집어넣고 우는 이도 있고 진저리를 치며 가까운 별을 괴롭히거나 별을 구으려고 불을 피우...

19/1008  
허수경 / 슬픔의 난민

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별 같은 독서의 시절은 왔다 세계를 읽다보면 이건 슬픔으로 가득 찬 배고픔으로 억울한 난민의 역사 같아서 빛 속에서 나던 냄새를 맡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저 어린 새들에게 아버지 아버지 날 버리세요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죽지 않은 신들 가운데 제일로 다정하던 ...

19/1008  
허수경 /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나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가장...

19/1008  
허수경 / 달이 걸어오는 밤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오, 달은 내 속...

19/0703  
허수경 / 정든 병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

19/0109  
허수경 / 흰 꿈 한 꿈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 술병을 감추고 마시며 기어코 말하려고 말하기 위해 가려고, 그냥 가는 바람아, 내가 가엾니?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 두통의 길이여 고장난 차는 불쌍해, 왜? 걷지를 못하잖아, 통과해 ...

19/0109  
허수경 /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

19/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