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박정대 / 의열義烈하고 아름다운

낡은 흑백사진 속의 얼굴처럼 흐린 하늘, 톱밥난로 속에서 의열의열 소리를 내며 바알갛게 타오르는 불꽃들 터져 나오는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가루약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용의 뿔처럼 흩어져 간 동지들을 생각한다 자꾸만 기침이 난다 말을 한다는 건 여전히 아름다운...

20/0729  
박정대 /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키치라 해도 좋소 무더운 여름밤을 건너가기엔 그 말투가 좋았던 것이오 자정이 넘은 코케인 창가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적막한 거리 풍경이 좋았던 것이오 햇빛 씨의 열기가 대낮의 조국을 뜨겁게 달구고 그 열기는 밤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소 111년 만에 찾아...

19/0930  
박정대 / 천사가 지나간다

마치 겨울을 외투처럼 걸친 채 그가 지나갔다 그림자에는 영혼이 없다 태양의 흑점을 밟으며 그가 언덕을 넘어갔다 담배 연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햇살 밝은 창가에서 여자는 담배 연기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 누구도 담배 연기의 말을 듣지 못한다 자정의 태양 아래를 그가 ...

17/0209  
박정대 /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12/0303  
박정대 / 당나귀 여린 발자국으로 걸어간 흙밤

내 고독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사랑이 왔네 사랑은 고통처럼 깊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봄밤은 좀처럼 마당가에 있는 꽃봉오리에게로 가지 못하네 나는 습관처럼 또 담배를 피워 물고 지금 다시 사랑은 치명적으로 덜컹거리네, 밤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 가수들은 밤새 파두...

16/1231  
박정대 / 비원

그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원 바람이 불 때마다 주합루에 앉아 일렁이는 취병(翠屛)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지 흔들리는 시누대 울타리는 변덕스런 세상 같아 그런 마음들, 흘러가는 구름의 어깨 위에나 걸어두고 부용지에 술잔을 띄우지 화답 없는 유상곡수연의 날들 내가 띄운 술잔을 스스로 거...

16/1231  
박정대 / 정선

정선이 고향인 나 서울에서 국수를 삶아 먹으며 한 끼를 해결하네 창밖에서 들려오는 공사장 굴착기 소리를 말발굽 소리로 바꾸어보아도 마음엔 끊임없이 중국발 미세먼지들만 날아들어오네 당시지로(唐詩之路)라 했던가 아주 먼 옛날 당나라쯤에서 시의 길을 따라 천하를 주유하다 고요히 사라지고...

16/1231  
박정대 / 사월의 나무 한 그루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는 아침에 나는 가까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푸른 맨발을 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침의 가깝고도 먼 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여 너는 지난밤 무거운 공기들의 외투를 벗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나고 있구나 정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너를 드러내 보이는 이 순결...

16/0414  
박정대 / 

컴퓨터를 켤 때마다 르르르……, 클레지오, 그르르르……, 클레지오 울면서 대답하는 너

16/0201  
박정대 / 슬픈 열대야

이곳은 창문 너머로 야자수 같은 게 흔들거리는 슬픈 열대야 아니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물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 지금은 오래된 유행가처럼 어디선가 한 소절 바람이 불어온다 슬픈 열대야, 나 지금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어 지금은 안 보이는, 너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씻고 있어 ...

16/0201  
박정대 / 앵두꽃을 찾아서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

16/0201  
박정대 / 디베르티멘토

창가에 앉아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면 발바닥을 간질이고 싶어진다. 생각을 너무 골똘히 하니 뒤통수에 뿔이 돋지 어두워지는 창가에 앉아 반가사유상 흉내를 내다 보면 발바닥이 근질근질해진다. 아 누가 내 발바닥을 좀 간질여다오 술 마시고픈 저녁이다. 갸륵하게 어두워져 가는

16/0201  
박정대 / 시인박멸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간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15/0308  
박정대 / 얼굴에 콧수염을 붙인 천사

넌 왜 얼굴에 콧수염을 붙였지 가로수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낙엽들이 떨어졌다 태양은 조금 상해 있었고 바람에서는 비의 냄새가 났다 나는 뗀뚝과 뚝바가 먹고 싶어 명동성당 앞 포탈라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너는 왜 쩔뚝거리며 걷지 발길에 채이는 몇 장의 나뭇잎들이 자꾸만 물어왔다 난 티베트도 창...

14/0213  
박정대 / 약속해줘, 구름아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지는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르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13/1231  
박정대 / 백년 동안의 가을

백년 만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 가을을 뒤따라 온 노을은 몇억 년 만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강물 속으로는 어제 본 듯한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바람에 떠밀려 간 어제는 이미 아득한 전생입니다 물속의 새들은 젖지도 않고 가벼운 깃털로 이 生涯를 경쾌하게 건너갑니다 나는 내 눈동자의 카메라로 기...

13/1016  
박정대 /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

12/1117  
박정대 /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

유랑극단에서 공중 곡예사는 꼭 필요한 극단적 존재, 마치 코끼리가 동물을 대표하듯 극단적 차원에서 허공을 대표하는 공중 곡예사는 꼭 필요한 존재 공중 곡예사의 상징은 날개, 날개는 천사의 상징이기도 하지 천사가 날개를 떼어버리고 지상으로 하강할 때 천사였던 그녀 혹은 그에게 필요한 것은...

12/1101  
박정대 / 나타샤 댄스

나타샤가 춤을 춥니다. 아주 깊은 러시아의 밤이구요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는 난로를 지피고 물을 끓입니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서서히 끓어오릅니다, 물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구요 흰 눈이 이렇게 펑펑 쏟아지는 밤이면 고통이며 고독도 눈발에 묻혀 고요한 잠에 듭니다 이곳에...

12/0925  
박정대 / 어제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

12/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