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김선우 / 조금 먼 아침

나비는 네거리로 갈 것이다 한 나라를 상여에 싣고 장지로 가는 동안 먹은 것 없이 자주 체하는 백 년이에요, 낭인의 노래 위에서 나비가 잠시 졸고 끝없이 잠시 졸고 도시는 격렬한 척 시든다 꿈에서 만난 죽은 사람에게 흰죽을 한 숟가락씩 떠먹이는 자세로 나는 네거리에서 흰죽을 먹고 있다 숟...

19/1025  
김선우 / 견주, 라는 말

주인 없는 개, 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 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 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 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분뿐 거지. 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야 개, 아닐는지? 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

19/1025  
김선우 / 바람의 옹이 위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로 앉아

봄꽃 그늘 아래 가늘게 눈 뜨고 있으면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좋아 먼지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애틋해 비로소 몸이 영혼 같아 내 목소리가 엷어져가 이렇게 가벼운 필체를 남기고 문득 사라지는 것이니 참 좋은 날이야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참 근사한 날이야 인간이 하찮게 느껴져서

17/0610  
김선우 / 아나고의 하품

언젠가 횟집에서 아나고 한 마리 회 뜨는걸 보았을 땐 머리를 쳐내고 껍질을 벗겨내면 그제사 퍼득퍼득, 몸통 전체로 희디흰 슬픔의 가시 같은 게 되어 자꾸 머리를 찔러대려는 걸 보았을 땐 머리는 점잖게 거의는 고독하게 한번 크게 입 벌려 생애 마지막 하품을 하고는 영영입 다물어버리는 것이었는...

17/0212  
김선우 / 이런 이별

-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 트리와 어린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가 깨...

17/0209  
김선우 /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시간에

시간이……없다고? 마치 시간을 가져본 자처럼 말하는군 당신이 가진 24시간을 필요에 따라 나눠 쓴다는 듯이 시간이 든 알사탕 주머니를 소유한 관료처럼 제복을 입은 스물네 개의 병정인형이 흰 계단과 검은 계단을 꾹꾹 누르며 악보에 적힌 대로 안녕하게 행군한다는 듯이 이봐, 모른 척하고 싶겠지...

17/0209  
김선우 / 시집

벗지 않고 어떻게 너를 만나니? 벗지 않고 어떻게 나를 만지니? 누군지 모른 채 동침할 때도 있다 모르는 너인데……입가에 묻은 하얀 침 자국……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문득 좋아서……아득히 오래 운 적이 있다 모르는 이와의 동침이 자주 일어나는 이런 몸, 상스럽고 성스러운 음란의 책

17/0209  
김선우 / 빗방울 밥상

빗방울 밥을 지었어요 어떤 빗방울은 아직 설익고 어떤 빗방울은 너무 푹 익고 어떤 빗방울은 끈기가 너무 없고 어떤 빗방울은 악착같이 달라붙죠 그런대로 섞여서 밥 한 고봉이 되면 밥이라 할 수 없던 것이 밥이 되는 세월도 오죠 저마다 다르게 몸에 묻혀온 빗방울들의 냄새를 밥냄새라 생각...

17/0124  
김선우 / 

나는 지금 애인의 왼쪽 엉덩이에 나 있는 푸른 점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 내가 당신이었을 때 이 푸른 반점은 내 왼쪽 가슴 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과학 시간 칠판에 점 하나 쾅, 찍은 선생님이 이것이 우리 은하계다! 하시던 날 솟증이 솟아, 종일토록 꽃밭을 헤맨  ...

16/0414  
김선우 / 폭포탕 속의 구름들

24시간 찜질방 사우나 폭포탕에서 구름여자들 폭포 줄기를 맞고 있네 어깨 등 허리에 물줄기 맞는 동안 새근새근 일렁인 건 구름들의 뱃살 여자들 뱃살 한 번씩 흔들리자 잘 익은 노을 자르르 주름 일며 수평선 자욱한데, 나는 여자들의 뱃살이 좋아 내 기원에 밀접한 가장 안쪽 꽃밭의 흙 농밀한...

16/0101  
김선우 / 해괴한 달밤

딱― 딱― 따귀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이 중천에서 때마침 기다란 손바닥 같은 구름이 달을 가리며 지나는데 따악― 아이쿠 저거, 달이 따귀를 맞고 있는 거 아냐? 연거푸 달려온 구름들의 뭇매를? 토라진 구름 씩씩대는 구름 입술을 잘근 씹는 구름 저마다 자기 사연이 가장 애달프다는 듯 명랑하...

12/0715  
김선우 / 고양이와 호랑이와 초록빛 무덤의 묘비 사이

끝내 어딘가 삐딱한 그 말 때문에 완성할 수 없었던 시가 있다 이제 그대가 그 말을 허락해 주어도 좋은 시간이 왔다 백년도 넘게 방황한 나를 느낀다 평생 동안 현기眩氣를 앓아온 두 귀가 주저앉으며 그만 문 닫으려는 순간, 그 말이 올 것이다 묘비에 맺힌 얼룩 이슬

12/0715  
김선우 / 대관령 옛길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 각생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12/0625  
김선우 /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

12/0607  
김선우 / 꽃밭에 길을 묻다

1 어젯밤 나의 수술대에는 한 아이가 올라왔습니다. 작고 노란 알약 같은 아이의 얼굴. 신경들이 싸늘한 슬픔으로 명랑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수술용 장갑을 끼었지요    2 아이가 내 수술실을 노크한 건 지난 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태백에 가는 길이었지요. 태백...

11/1005  
김선우 / 그 마을의 연못

연못이 있었다 마을의 서쪽 혹은 동쪽 흰 수련 만발하는 보름의 밤이면 여인들이 물의 아이를 낳으러 온다나 반인반수의 선지자가 새점을 친다나 금단의 열매 향기롭다 하였으나 이방인에게는 연못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울창한 전나무와 검은 딸기만 무성한 그곳은 깊고 푸른 ...

11/1005  
김선우 / 짜디짠 잠

동안거 끝낸 스님네와 차를 마신다 안거할 곳 없는 내 겨울잠은 새 발자국 모양의 가지 끝에서 천일염을 만든다 찻잎이 너무 많았는지 묵상이 너무 길었는지 진하게 우려진 차 한모금 차가 짭니다. 한스님이 입을 연다 짭니까 차 달이던 스님이 나를 보고 물으신다 독하다고 해야 할지 쓰...

11/1005  
김선우 / 겨우살이 - 그림자의 사전 1

겨울 숲 새둥지처럼 군데군데 한없이 여린 풀빛이 뭉쳐 있다 물세탁된 지폐처럼 보드라운 풀빛 인간의 사전은 그 풀빛을 \'기생\'이라 부르지만 참나무와 겨우살이의 공생은 그들의 사정 옹이가 더러 굵어지고 열매를 조금 덜 맺지만 조금 덜 가지고 함께 살 수 있어 참 재미난다고 쪼글한 입매를 가...

11/0928  
김선우 / 양변기 위에서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

11/0119  
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1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