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황지우 /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奇籍)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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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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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서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옛집은 제자리에서 나이와 함께 커져가는 흉터;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는 그 집 뒤편에 1950년대 후미끼리 목재소 나무 켜는 소리 들리고, 혹은 눈 내리는 날, 차단기가 내려오는 건널목 타종 소리 들린다. 김 나는 ...

09/0922  
황지우 / 흑염소가 풀밭에서 운다

제비들, 돌아가려고 흐린 날에도 나가서 편대 연습하고 돌아오는데 방죽에 억새 덤불이 뒤집히면서 일제히, 풀잎 뒷면의 은빛을 드러낸다 저기 멀리 오키나와 섬에서 바람이 불고 있을 거다 초록빛 방죽 물의 거죽, 心亂하다 그리고 축 처진 하늘을 이고서 몸부림치는 풀밭; 방금의 生을 잊어먹...

09/0919  
황지우 / 만수산 드렁칡 1

오 亡國은 아름답습니다 人間世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우리 세상은 국경에서 끝났고 다만 우리들의 털 없는 흉곽에 어욱새풀잎의 목메인 울음 소리 들리는 저 길림성 봉천 하늘 아래 풀과 꽃이 몹시 아름다운 彩色으로 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른 ...

09/0720  
황지우 / 입성한 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문밖에 있는 당신들이다. 당신들을 붙들고 있는 고리를 나는 탐색해왔다. 그 고리의 끝에 달려 있는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나는 이 지상의 가장 靜寂한 땅으로 입성한다. 나는 미래를 포기한다. 1984년 여름이라고 失記된 노트 위에서

09/0720  
황지우 / 벽 2

- 낯선 시간 속으로   이 벽은 이인성 소설집,『낯선 시간 속으로』의 표지와 같다 이 벽은 신문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지방 일간지 7면 문화면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파스텔로 회칠한 벽이다 금이 가고 애매모호하다 냉담하고 덮어도 덮어도 다 덮여지지 않는 세속이다 이 벽...

09/0720  
황지우 / 저울 위에 놓인 바나나

보라매병원 입구의 과일 상점들; 먼저 문병받는 과일들은 제각각의 색깔들로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을 중환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뇌일혈로 떨어진 朴선생님은 입벌리고 멍하게, 곧 문상객이 될 옛 동지들을 바라만 보고 계셨다 때로 육체는 생의 格을 무참하게 회수해가버린다 일생 동안 쌓은 것을 한순...

08/1102  
황지우 / 경고

詩는 슬렁슬렁 쉽게 쓰는 편인데,  밥 벌어먹기 위해서 쓰는 잡문을 쓸 때는 줄곧 줄담배다. 이건 生活이 아니라 숫제 자학이다. 원고지 파지 위에 놓은 88담배: ┌─────────────────────────┐ │  경고: 흡연은 폐암 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특...

08/1102  
황지우 / 飛火하는 불새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인정했다 나는 파드득 날개쳤다 冥府에 날개를 부딪히며 나를 호명하는 소리 가 들렸다 나는 무너지겠다고 ...

08/1029  
황지우 / 서풍西風 앞에서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 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 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08/1029  
황지우 / 메아리를 위한 각서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여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 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소리 들릴락말락 (우리는 어느 계곡에 묻힐까 들릴까) 줄넘기하는 쌍무지개 둘레에 한 세상 걸려 있네

08/1029  
황지우 / 봄바다

봄바다에 이름을 알 수없는 노란 꽃잎들이 가득 흘러간다 노랑나비가 그 이상한 꽃에 홀려 일생으로 못 갈 바다를 따라간다 앞뒤 안 보고 더듬이로만 노란 그 목표물에 밀착해서 멋모르고 가다 보니 발 댈 곳 없는 물 위였다 不歸不歸 끝 간 데 없는 심연을 건너간다 이 작은 날개로 ...

08/1025  
황지우 / 안부 1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

08/0919  
황지우 / 12월의 숲

눈 맞는 겨울나무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

08/0911  
황지우 /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

08/0707  
황지우 / 비닐새

흐리고 바람 부는 날 언덕을 오르는 나에게 난데없이 대드는 흰 새를 나는 쌱 피했다 피하고 보니, 나는 알았다, 누가 버린 農心 새우깡 봉지였다 칠십세 이하 인간에게 버림받은 비닐새, 비닐새여 내 마음을 巡察하는 흰 새여 흐리고 바람 마음대로 부는 날의 언덕은 이 세...

08/0707  
황지우 /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08/0707  
황지우 / 등우량선 (等雨量線) 1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

08/0707  
황지우 / 가을 마을

저녁해 받고 있는 방죽둑 부신 억새밭, 윗집 흰둥이 두 마리 장난치며 들어간다 중풍 든 柳氏의 대숲에 저녁 참새 시끄럽고 마당의 殘光, 세상 마지막인 듯 환하다 울 밖으로 홍시들이 내려와 있어도 그걸 따갈 어린 손목뎅이들이 없는 마을, 가을걷이 끝난 古西들에서 바라보니 사람이라면 ...

08/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