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황인숙 / 옛이야기

아무리 애 터지는 슬픔도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흐릿해지지 시간은 흐르고 흐려지지 장소는 어디 가지 않아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은 영원한 것 같은 아플 것 같은 아플 것 같은 장소들

19/0930  
황인숙 / 뭐라도 썼다

잠 깨려고 커피를 마신 적 있나? 있다 있긴 있다만 대개는 잠을 깨려고 마시기보다 깨어 있어서 마셨다. 라고 나는 썼다 커피는 썼다 인생이 쓰고 즘생도 쓰고 뭐든지 쓴 밤 쓰이지 않은 건 잠뿐 트리플 샷을 마셔도 쏟아지는 잠 그래, 커피는 마시는 것보다 쏟는 게 더 잠을 깨게 한다지 뭐라도 써...

19/0930  
황인숙 / 서글프고 피로한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한껏 고개를 잦히고. 나무들이 웃으며 쓰러져왔다. (우리 중 한 사람은 갈 곳이 없다) 나무들의 톡 쏘는 향기가 자욱한 공원. 우리의 왕초 달님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우리는 네 개의 달. 네 그루의 나무, 네 마리의 이리. 도시는 멀리 ...

19/0109  
황인숙 / 겨울 정류장

오다가 버스도 어디선가 얼어붙어버렸나보다. 하늘은 물 든 지 오랜 갯밭빛이다. 노을의 끄트머리가 녹슨 닻처럼 던져져 있다. 바람결에 한 고랑에 모인 서로 낯모르는 가랑잎들 바스락거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이 옹송그리고 있다. 길 아래 교회 첨탑 위 성탄의 별은 소금빛...

19/0109  
황인숙 / 칠월의 또 하루

싸악, 싸악, 싸악, 싹싹싹 자루 긴 빗자루로 자동차 밑 한 웅큼 고양이밥을 하수구에 쓸어버린다 \"내가 밥 주지 말라꼬 벌써 멫 번이나 말했나?\" 동네 부녀회장이라는 이의 서슬이 땡볕 아래 퍼렇다 나는 그저 진땀  된땀 식은땀을 쏟을 뿐 찍소리 못 하고 선 내게 그이는 빗자루를 땅...

19/0105  
황인숙 / 중력의 햇살

이제 그만 아파도 될까 그만 두려워도 될까 눈물 흘린 만큼만 웃어봐도 될까* (양달 그리운 시간) 삶이란 원래 슬픔과 고뇌로 가득 찬 거야 그걸 알아챈 이후와 이전이 있을 뿐 (양달 그리운 시간) 우리 모두 얼마나 연약하고 슬픈 존재인가 (양달 그리운 시간) 한겨울에 버려진 고양이에 ...

17/0703  
황인숙 / 의자

만유인력이 예고 없이 손을 끊을 때 머리도 없이 가슴도 없이 부딪힐 곳도 없는데 메아리 가득한 벌판처럼 하늘은 빙빙 돌고 땅은 번쩍거릴 때 안돼. 안돼. 의자는 받쳐준다 의자에 몸을 던지면 마음은 연잎에 고인 빗방울처럼 동그래진다 왼손을 들어 왼눈에 대고 꾹꾹 누르고 싶을 때 눈을 감았는...

17/0530  
황인숙 / 이렇게 가는 세월

오늘 하루는, 나랑 약속을 잡아놓고도 또 친구를 만나러 가네 그렇게 됐으니 오늘 밤에는 꼭, 미룬 약속을 또 못 지키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네 아, 정말! 맨날맨날맨날! 나한텐 언제 시간 내줄 거야? 우리가 진짜 \'자기 사이\' 맞기나 하니? 왜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해? 일찍 돌아올게 가책을 ...

17/0209  
황인숙 / 해피 뉴 이어!

새해 첫 해를 보러 동쪽 바닷가에 갔었죠 모래밭 여기저기 혼자서 둘이서 여럿이서 모르는 사람들이 서 있었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람에 목도리와 머리카락 날리면서 두근두근 해를 기다렸죠 기다리지 않아도 해는 뜨겠지만 우리는 기다렸죠 푸른 파도 검은 솔숲 흰 모래알들 무대는 그대로지만 두근두...

17/0209  
황인숙 / 바람의 벌판

뜨락에 조그만 나무 조그만 바람에도 몸을 뒤채며 사르랑거리네 하늘의 구름 신들린 무당처럼 바람에 불려 달리는 구름 죄 제각기 음을 감춘 걸 바람은 아네 죄 제각기 몸짓을 감춘 걸 바람은 아네 그리고 그들은 바람이 아는 걸 아네 그대의 비밀이 궁금하면 허허벌판에 홀로 가 서라 오직 홀로! 머...

17/0124  
황인숙 / 지붕 위에서

나는 드디어 소원을 이뤘노라 발가벗, 지는 못했지만 하나 가득 바람을 채워놓고 맨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워 눈길을 하염없이 가게 두는 것 별이 하나 둘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일곱 여덟 개 빨래줄 사이에서 흔들리며 잘 마르고 있다 한옆에서 달은 부표인 척 떠 있다 아무것에도 닿지 않은 ...

16/0425  
황인숙 / 가을 햇살

파란 자동차 보닛이 하얗게 스쳐가는데요 바람은 하늘을 비눗방울처럼 가벼이 치켜올리는데요 사람들은 마주 웃고 햇빛은 창창한데요 나는 얼른 나무 그늘에 숨었어요 나는 입을 꼭 다물었어요 (잇새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자꾸만 눈물이 흘렀어요 내 얼굴은 으깨어진 토마토 어두워지기 전에는 한 ...

16/0101  
황인숙 /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15/0926  
황인숙 / 이제는 자유?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오네. 점점 차거워지네. 서리가 끼네. 꼬들꼬들 얼어가네. 줄이 비비 꼬이네 툭, 툭, 끊어지네. 아, 이제 전화기에서 뚝 떨어져 자유로운 수화기. 금선이 삐죽 달린 그걸 두고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네. 전화기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도 갈 수 있다네

12/1209  
황인숙 / 일요일의 노래

북풍이 빈약한 벽을 휘휘 감아준다 먼지와 차가운 습기의 휘장이 유리창을 가린다 개들이 보초처럼 짖는다 어둠이 푹신하게 깔린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11/1005  
황인숙 /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11/0119  
황인숙 / 후회는 없을 거예요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오, 오, 오오, 여가수가 노래한다 남겨진 여자가 노래한다 마음을 두고 떠난 여자도 노래한다 후회로 파르르 떠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마사이 워킹화를 산다 판매글 마지막에 적힌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한 구절에 일전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를 샀다 ...

10/0512  
황인숙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

09/0730  
황인숙 / 아침의 목록

덜 깬 꿈의 지느러미가 스쳐 지나간다 남실거리는 금빛 입자들 사방팔방 꼬리를 물고 밋밋한 유리창과 묵묵한 벽 헐벗은 가로수, 허름한 4차선 길 羅針처럼 떨고 멀리 가까이 골목 끝마다 바스락 발소리들 쌓이고 알 듯 말 듯 슬픈 듯 기쁜 듯 내 정든 거리 문득 벅차게 아름다움이여 ...

09/0709  
황인숙 / 딸꾹거리다 1

아버지는 감자찌개의 돼지고기를 내 밥 위에 얹어주셨다. 제발, 아버지. 나는 그것을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켰다. 그러면 아버지는 얼른 또 하나를 얹어주셨다. 아버지, 제발. 비계가 달린 커다란 돼지고기가 내 얼굴을 하얗게 했다. 나는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

09/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