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황동규 / 시가 사람을 홀리네

매일 같은 방향에서 머리 내미는 게 지겹다고 둥근 해 서녘에서 뜨는 일 없고 산책길 언덕 꽃들이 모여 수다 떨다 서로 냄새 바꾸는 일 없지만, 늘 뽑는 시의 맛 조금만 맥없이 뽑아내도 싱거운 천이라고? 가을꽃들도 비 개면 다들 전보다 더 튀는데 시인이여, 시의 무늬를 짤 때 탁탁 튀게 짜시게. ...

21/0206  
황동규 / 밟을 뻔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마스크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그만 풀꽃 둘이 시...

21/0206  
황동규 / 겨울을 향하여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집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

21/0104  
황동규 /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1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 길이 속삭인다. 계속 가요, 길은 가고 있...

20/0729  
황동규 / 지상의 양식

토요일 오후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한번 다르게 살아보려고 나하고도 달리 살아보려고 주말이라 주차장이 비어 일부러 아파트 제일 먼 곳에 차를 세우고 걸었다. 한 동(棟) 화단에 영산홍들이 때맞춰 환하게 피어 너무 피어 시드는 기색 있는 놈을 막 지나자 어째 이리 됐지? 반으로 깨어져 속이 드러난...

19/0109  
황동규 / 귀뚜라미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켠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

19/0105  
황동규 / 살다가 어쩌다

천천히 말끝 흐리며 두팔로 어이없다는 몸짓까지 지어 꼿꼿이 앉아 같이 차 마시던 사람 고개 끄덕이게 한 날 말들이 정신없이 뻥 튀겨진 날 썰물이 조개 숨은 곳 게의 집 문턱까지 모두 다 드러내는 강화 개펄로 달려간다. 구름 떠 있고 물결은 저만치서 혼자 치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개펄이 손을...

17/0703  
황동규 / 잘 쓸어논 마당

쌀알 눈 사르락사르락 내리다 말다 할 때 어느 골짜기도 좋지만 우연히 들른 이름 없는 골짜기 일주문도 없이 숨어 있는 조그만 절에 닿기 직전 꽃이라든가 녹음이라든가 여럿이 내는 새소리라든가 돌 박힌 길에 제대로 착지 못하고 구르는 낙엽이라든가 긴 눈 맞고 있는 전나무 길이라든가 그런 게 없...

17/0209  
황동규 / 연옥의 봄 4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은 채 갈 거다. 마음 데리고 다닌 세상 곳곳에 널어뒀던  추억들 생각나는 대로 거둬 들고 갈 거다. 개펄에서 결사적으로 손가락에 매달렸던 게, 그 조그맣고 예리했던 아픔 되살려 갖고 갈 거다. 대낮이다. 밥집으로 갈까, 쥐똥나무 꽃 하얗게 핀 낮은 울타리 ...

17/0209  
황동규 / 물소리

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 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 추억이 어수선했던가, 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 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 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지를 튼 낡은 해신당 ...

16/0101  
황동규 / 네가 없는 삶

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네가 말했을 때 우리는 천천히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앞 벼랑 끝에 V자형 진달래꽃 뭉치 뛰어내릴까 말까 아슬아슬 걸려 있고 저수지 수면은 온통 새파란 물비늘, 아주 정교히 빚은 그릇일 수도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말하려...

15/0308  
황동규 / 장기 기증

재활의원 물리치료실, 코트와 웃옷 벗어 벽에 걸고 좁은 침대에 엎드려 등에 타박상 입은 도마뱀처럼 앞으로 한 뼘 뒤로 한 뼘 기고 뒤집히기도 하며 하루치 물리치료를 끝낸 후 온몸 얼얼해 돌아오다 장기 기증 권하는 전화를 받았다. 버스 소음이 귀에 거슬리지만 들리긴 들립니다 네, 잘 알겠습니...

13/0216  
황동규 / 사는 기쁨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가까이 두지 않고 70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

13/0203  
황동규 / 연필화 鉛筆畵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춰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

11/0130  
황동규 / 눈 내리는 포구

그대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세상을 본다 석회의 흰빛 그려지는 生의 답답함 귀 속에도 가늘게 눈이 내리고 조그만 새 한 마리 소리 없이 날고 있다 포구로 가는 길이 이제 보이지 않는구나 그 너머 섬들도 자취를 감춘다 꿈처럼 떠다니는 섬들, 흰빛으로 사방에 쏟아져 눈 맞는 하늘 자취를 감춘다...

10/0501  
황동규 /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처럼 계속 물감을 바르라 보채는 캔버스를 벗어나 어디 숨 좀 쉴 공기를 찾아 피스톨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 까마귀 줄지어 나르는 누런 밀밭이 아직 있을까? 가며가며 금속피로처럼 쌓이는 마음의 안개 잠시 밀어내고 과일과 과자 꾸러미를 사들고 뵈지 않게 숨어서 우는 아이들...

09/0919  
황동규 / 향(香)

비 긋자 아이들이 공 차며 싱그럽게 자라는 원구 초등교 자리, 가톨릭 대구 교구 영해 수련장 현관 앞에 서 있는 향나무 선들바람 속에 짙은 초록으로 불타고 있다. 나무들 가운데 불의 형상으로 살고 있는 게 바로 향나무지. 중얼대며 자세히 살펴보면 몇 년 전 출토된 백제 금동 향로 모습...

09/0915  
황동규 / 보통법신(普通法身)

\'그대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른가?\'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예수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의 답은 이렇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비로자나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노랑나비 하나가 ...

09/0706  
황동규 / 젊은 날의 결

그날 회현동 집 그날 회현동 집, 하루 종일 눈 내리다 말다 했다. 남산 언덕의 눈 쓴 전나무들 보이다 말다 했다. 전나무 속에 숨어 있는 전나무 하나 그리워하다 말다 했다. \'위험하게 살아라!\' 니체가 말했다. 난로 위에서 주전자 물이 노래하면서 끓었다. 노래로 사는 게 가장 ...

09/0508  
황동규 / 당진 장고항 앞바다

갑판에 누워 있는 우럭들을 마주하고 소주를 마신다. 회칼로 생살 구석구석을 저미는 눈부신 아픔에 몸 다 내준 더 무덤덤한 얼굴들. 이제 더는 없어, 하며 하나같이 가시를 내보이는 저 썩 괜찮은 죽음의 아이콘들! 회는 조금 달고,소주 몇 모금 끄트머리는 안주가 생살이라고 알맞게 핏기운...

09/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