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함민복 / 무신론자

사람들은 다 죽는다 죽음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가능한 한 죽음과의 약속 시간을 늦추고 싶어 간헐적 다이어트를 하고 대장내시경을 하고 태반주사를 맞고 뒤로 걷고 곰쓸개를 먹고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투기를 하고 강을 파헤치고 원자력발전소를 만들고 부정선거를 하고 독재를 하고 무기를 ...

19/0105  
함민복 / 글씨체

달리는 버스에서 쓴 글씨가 삐뚤빼뚤 낯선 이 글씨체는 누구의 글씨체일까 버스체다 굽은 길체다 움직이는 지구에서 쓴 모든 글씨는 지구 글씨체다

19/0105  
함민복 / 

눈 내린 거름더미 귤껍질 소복 멀리 제주도에서 뭍을 향해 우르르 던진 반달 꽉 찬 공들 방방곡곡 수천수만의 입에서 터지는 오, 향기의 파편 스트라이크!

17/0209  
함민복 /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 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16/0413  
함민복 / 하늘길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

15/1229  
함민복 / 산이 난다

큰 새들의 날개는 산을 닮았다 기러기가 날아올 때 선(線)으로 된 산도 함께 날아온다 갈매기가 머리 위를 지날 때 면(面)으로 된 산도 지난다 산이 운다 울며 날아가는 산(山)아! 사람들이 서로 껴안을 때 사람들의 팔도 산모양인 것 너희들도 보았느냐

13/0426  
함민복 /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살며 풀어 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13/0424  
함민복 / 돌에

송덕문도 아름다운 시구절도 전원가든이란 간판도 묘비명도 부처님도 파지 말자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운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돌엔 돌은 읽기만 하고 뽀족한 쇠끝 대지 말자

12/1231  
함민복 /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

12/0715  
함민복 / 앉은뱅이 저울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

12/0715  
함민복 / 뻘에 말뚝 박는 법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줄 써개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

12/0715  
함민복 / 칠석

달빛 내 리 고 장독대 정 안 수 한 사발 어 머 니 아, 저것이 美信이다

12/0715  
함민복 / 최제우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는가 기러기 떼 八자 대형으로, 人자 대형으로 동학군의 혼령인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 쓰며 人乃天 하늘을 自習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저리 살아 우는 글자가 어디 또 있으랴 목을 턱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서늘하다

12/0715  
함민복 / 꽃게

돌게끼리 만나 길을 가게 비키라고 다투다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합니다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자꾸 가위만 내 승부가 나지 않는데도 서로 이겼다고 양손으로 V자를 만들어 치켜듭니다 옆으로 가기 때문에 그냥 가도 부딪히지 않는다고 바위, 모양 ...

12/0715  
함민복 / 가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12/0715  
함민복 / 그늘 학습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더 앉아 있어야겠다

12/0715  
함민복 / 감나무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

12/0715  
함민복 / 서울역 그 식당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

12/0715  
함민복 /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12/0715  
함민복 /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과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러주는 달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1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