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최승자 / 억울함

사공이 사라진 하늘의 뱃전 구름은 북쪽으로 흘러가고 청춘도 病도 떠나간다 사랑도 詩도 데리고 모두 떠나가다오 끝끝내 해가 지지도 않는 이 땅의 꽃 피고 꽃 져도 남아도는 피의 외로움뿐 죽어서도 철천지 꿈만 남아 이 마음의 毒은 안 풀리리니 모두 데려가다오 세월이여 길고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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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 한 목소리가

한 목소리가 허공에 숨어 있다. 눈빛을 반짝이며 십년을 숨어 떠돌던 목소리, 언젠가 누군가의 베개맡에서 사랑해 라고 말했던 목소리. 이윽고 말갛게 씻겨져 나간 백골의 추억으로 그대는 일어선다. 그대의 비인 두 눈구멍을 뚫고 두 줄기의 바람이 불어 간다. 뼈의 기타 가락이 별빛처...

16/0302  
최승자 /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적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

16/0302  
최승자 /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

16/0302  
최승자 /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

16/0302  
최승자 / 악순환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주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16/0302  
최승자 / 시인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켰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그리고 잘못 삼켰다. 이 피곤한 컹컹거림을 멈추게 해다오. 이 대열에서 벗어나게 해다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

16/0302  
최승자 / 내가 구원하지 못할 너

어두운 너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등 돌리고 홀로 서 있는 너, 슬픔의 똥, 똥의 밥이다. (너의 두 손은 뭉그러져 있었다.) 내가 꿈에서도 결코 구원하지 못할 너. 나는 다만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곁눈질로 읽으면서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체념하거나 너를 초월하면서…… 허무...

16/0302  
최승자 / 세기말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 이제 이 세기말은 내게 무슨 낙인을 찍어줄 것인가. 한계가 낭떠러지를 부른다. 낭떠러지가 바다를 부여잡는다. 내가 화가 나면 나를 개 패듯 패줄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오 맞아 죽은 개가 되고 싶다.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

16/0302  
최승자 / 내 수의를

내 수의를 한올 한올 짜고 있는 깊은 밤의 빗소리. 파란 이승에서 어질러놓은 자리, 파란만장한 자리 없었을 듯, 없었을 듯, 덮어주고 있구나. 점점 더 드넓어지는 이 일대의 물바다, 그 위에 이제 새로이 구중궁궐 깊은 잠의 이불을 펴리라

16/0302  
최승자 / 귀여운 아버지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16/0302  
최승자 / 해마다 유월이면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

16/0302  
최승자 /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

16/0302  
최승자 /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16/0302  
최승자 /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

16/0302  
최승자 /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16/0302  
최승자 / 어떤 아침에는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

16/0302  
최승자 /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

16/0302  
최승자 / 이 시대의 사랑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

16/0302  
최승자 / 나날

눈알을 앞으로 달고 있어도 눈알을 뒤로 바꾸어 달아도 약속된 비젼은 나타나지 않고 창가의 별이 쉬임없이 늙어 간다. 치아 끝이 자꾸 바스러져 나간다. 날마다 신부들은 무덤으로 떠나가고 날마다 앞 못 보는 아기들이 한 트럭씩 태어나고 느리고 더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 어둠의 볼륨...

16/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