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천양희 /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 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 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은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언로(言路)들 오! 육체는 슬...

20/0729  
천양희 / 무심천의 한때

무심천 변에서 무릎 세우고 몇시간을 보냈다 무심 속에서 온통 물을 이루는 물방울 물보라 물거품들 수심을 들여다보다 무심코! 없을 無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욕과 무등(無等)과 무소유의 나날들 그동안 집착하던 것들로 목이 메었다 몸은 벌써 강물에 젖고 마음이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무슨 억하심정으...

19/1109  
천양희 / 꽃점

어린 시절, 머슴애들과 나는 꽃점을 잘 쳤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먹고 있는 여자애(남자애)가 자기를 좋아하나 안 하나를 꽃잎 한 잎 따면서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로 맞춰보았다. 어린 시절, 머슴애들과 나는 소꿉놀이를 잘 했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먹고 ...

19/0307  
천양희 / 겨울 길음동

골목이 텅 비었다 개들도 주정꾼도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 육교 쪽 가로등이 뿌옇다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담을 넘는다 파출소 뒷길 부산상회 탁씨 갈매기 바다 위에…… 콧노래 부르며 덧문을 닫고 있다 늦은 밤 버스 종점 바람이 차다 빈 택시 한 대 총알처럼 지나간다 지가 빠르면 세월보다 빠름감 ...

19/0211  
천양희 / 2월은 홀로 걷는 달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듯 밟으며 소리 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

19/0211  
천양희 / 한 권의 책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울 때까지 25년이나 견뎌야 한다네 새우 알은 큰 비가 내릴 때까지 천 년이나 사막의 흙속에서 견뎌야 한다네 연꽃 씨앗은 4천 년이나 늪 속에 파묻힌 채 묵묵히 견뎌야 한다네 어느 날 [견딤의 미학] 책 한 권을 읽었다네 그리고 내 생이 바뀌었다네 나는 드디...

19/0109  
천양희 / 나의 라이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염장이는 말하네 어렵고 무서운 건 살 때 뿐이지 딱 일주일만 헤엄치고 진흙속에 박혀 죽은 듯이 사는 폐어肺漁처럼 죽을 듯 사는 삶도 있을 것이네 세상을 죽으라 따라다녔으나 세상은 내게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꽃 하나 심어주지 ...

19/0105  
천양희 / 역驛

마음은 모르게 제 마음 밟고 떠나고 정거장 나온 몸이 다시 떠난다 家出하여, 굴러가는 바퀴살 처처에 박히는, 때로 길가에 내어말리는 세월이여 가는 길은 도대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갔다 가고 남은 길을 철길이 가린다 나, 평행선에 올라 밟는다 갈 길은 멀고 살 길은 짧아라 가슴속 끓는 기적...

17/0703  
천양희 / 이처럼 되기까지

복사꽃 지고 나면 천랑성별이 뜬다지요 아침 무지개는 서쪽에 뜨고 저녁 무지개는 동쪽에 뜬다지요 8초에 103음을 내면서 숲을 노래로 꽉 채우는 새가 있다지요 한 뿌리 여러 갈래인 나무에도 결이 있다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요 누워 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것이 가...

17/0610  
천양희 / 정작 그는

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 정작 그는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고요 자녀 교육의 지침서인 『에밀』을 쓴 루소 정작 그는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맡겼다네요 백지의 공포란 말로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말라르메 전작 그는 다른 시인보다 평생을 고통없이 살았고요 『행복론』을 ...

17/0610  
천양희 /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이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

17/0209  
천양희 /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아픈 말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이 나온 이 ...

15/0308  
천양희 / 거꾸로 읽는 법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보면 하루를 물구나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

14/0226  
천양희 / 새끼 꼬는 사람

일이 꼬일 때마다 새끼 꼬는 사람을 생각한다 길게 꼬이고 싶지않다는 생각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일이 풀릴 때마다 새끼 꼬는 사람을 생각한다 길게 꼬인 새끼를 풀고 싶다는 생각 생각 끝에 구불구불 끌려나오는 내 속의 새끼들 누가 새끼를 길게 꼬아 나아가면서 뒤로 물러나고 싶...

12/1209  
천양희 / 산이 나를 들게 한다

높은 산은 오른다 하고 깊은 산은 든다고 하네 오른다는 말보다 든다는 말이 좋아 산에 든 지 이십 년이 넘었네 산은 오래 들어도 처음 든 것 같고 자주 든 길도 첫길 같은데 나는 나이 들어도 단풍 든 것 같지 않고 눈에 든 풍경도 절경이 아니네 높은 자리에 든 사람도 깊은 산에 든 것은 아닐 것...

12/1209  
천양희 / 몽산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르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

12/0203  
천양희 /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

11/1213  
천양희 / 마음에 점 찍기

넓은 바다에 도장 찍고 밝은 달에게 도장 찍고 내 마음에도 도장 찍었지만 바람같은 그대에게 도장 찍지 못했네 마음에 점만 찍고 도장 찍지 못했네 나는 바다에게 부끄러워 나는 달에게 부끄러워 點 點 點 부끄러워 나는 어두워졌네

11/0702  
천양희 / 한계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 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

11/0212  
천양희 / 바다 보아라

자식들에게 바치노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없는 바다이신 받침없는 바다이신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 장 보내신다 \'바다 보아라\'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1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