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천상병 / 장마철

어제는 비가 매우 퍼붓더니 오늘은 비가 안 오신다 올해 장마는 지각생이다. 테레비 뉴스를 보면 올 장마에 큰 수해를 입었다는데 나는 외국 소식인가 한다. 장마여 비여 적당히 내리라 그래야 올 농사가 잘 될 것이 아닌가!

12/0709  
천상병 / 창에서 새

어느 날 일요일이었는데 창에서 참새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이런 부질없는 새가 어디 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도 많다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한참 천장을 날다가 달아났는데 꼭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새다. 사람이 사는 좁은 공간을 날다니.

11/0111  
천상병 / 난 어린애가 좋다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 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 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10/1010  
천상병 / 찬물

나는 찬물 잘도 마십니다. <물민족>이라며, 자꾸자꾸 마십니다. 그러면 생기가 솟구치며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됩니다. 자연의 정기를, 멀기는 하지만 흉내라도 내야 할 일이겠습니다. 만주의 송화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올 때 우리 선조들이 <물><물> 했듯이- 하늘 날으는 새...

10/1010  
천상병 / 간의 반란

육십 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그러면 어쩌지요? 될 대로 될 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쪼무래기가 뭘 할까만은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쿠데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습을 늙은 의사에게 묻...

09/0523  
천상병 / 주막에서

-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09/0425  
천상병 / 비 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

09/0401  
천상병 / 동창 (同窓)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은 굶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09/0108  
천상병 / 하늘

무한한 하늘에 태양과 구름 더러 뜨고, 새가 밑하늘에 날으다. 내 눈 한가히 위로 위로 보며 하늘 끊임없음을 인식하고 바람 자취 눈여겨보다. 아련한 공간이여. 내 마음 쑥스러울 만큼 어리석고 유한밖에 못 머무는 날 채찍질하네

08/1103  
천상병 / 기쁨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제킨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生色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

08/0918  
천상병 /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것도 막걸리로만 아주 적게 마신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다. 죄를 짓다니 안 될 말이다. 취하면 동서사방을 모른다. 술은 예수 그리스도님도 만드셨다. 조금씩 마신다는 건 죄가 아니다. 인생은 苦海다. 그 괴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술뿐인 것이다.

08/0918  
천상병 / 갈매기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08/0903  
천상병 / 날개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 여행뿐이었는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08/0828  
천상병 /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다오.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널찍하게 발동케 하...

08/0627  
천상병 / 고향

내 고향은 경남 鎭東, 마산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 바닷가에서 산천이 수려하다. 國校 一年 때까지 살다가 떠난 고향도 고향이지만 원체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 말이다. 사실은 사람마다 고향타령인데 나도 그렇고 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고향타령이 아닌가? ...

08/0627  
천상병 / 비 11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다.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08/0531  
천상병 / 

부슬부슬 비 내리다. 지붕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도 ---- 멀고먼 고향의 소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 아득한 곳에서 무슨 편지라든가 ...... 나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저 하나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향수여 나의 향수여 나는 직접 비에 젖어보고 싶다. 향이란 무...

08/0531  
천상병 / 노래

나는 아침 5시가 되면 산으로 간다 서울 북부인 이 고장은 지극한 변두리다 산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야겠다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내같이 노래를 못 부르는 내가 목청껏 목을 뽑는다 바위들도 그 묵직한 바위들도 춤을 추는 양하고 산등성이가 몸을 움직이는 양하고 새소리들도 ...

08/0530  
천상병 / 참새

참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와서 내 방문 앞에서 뜰에서 기분 좋게 쫑쫑거리며 놀고 있다. 저것들은 친구인가 부부인가? 하여튼 아주 즐거운 모양이다. 저들같이 나도 좀 안될지 모르겠다. 본능으로만 사는 새들이여 참새여 사람들은 이성이니 철학이니 하여 너희들보다 순결하지 ...

08/0517  
천상병 / 봄 빛

오늘은 91년 4월 14일 봄빛이 한창이다. 뜰에 나무들도 초록색으로 물들었으니 눈에 참 좋다. 어떻게 봄이 오는가? 그건 하느님의 섭리이다. 인생을 즐겁게 할려고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거다

08/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