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고정희 / 객지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예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과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랑하게 ...

17/0212  
고정희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 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

12/1219  
고정희 / 겨울 노래 - 편지 12

툴툴 털어버릴 수 있다면 내 핏줄과 사지 속에 비로서 집을 짓기 시작한 네 정체를 단번에 뿌리뽑아 버릴 수만 있다면 나의 오늘에서 내일로, 급기야는 내일에서 모레로 무단출입하기 시작한 이 건방진 광기를 와르르 쏟아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 소박한 새날의 시작은 얼마나 편안하며 또 눈부시랴 ...

12/0709  
고정희 / 오늘 같은 날 - 편지 7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 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흐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

12/0709  
고정희 / 소외 - 편지 4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

12/0709  
고정희 / 부재(不在) - 편지 2

너의 이름 가만히 불러보는 날은 창 너머 서산마루 어디에선가 퉁소 소리 한 가닥 떠서 울고 너의 이름 애태우며 잠재우는 밤에는 나의 꿈속 어디에선가 일만의 장고소리 일천의 징소리가 울었다 너의 이름 북서풍에 날려보내면 벼 포기 우거진 들판 가득 어화넘차 어화넘차 상여소리 떠가고 너의 이...

12/0709  
고정희 / 강물 - 편지 1

푸른 아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분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

12/0709  
고정희 /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편지 9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

12/0625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밥을 나누는 노래

함께 밥을 나누세 다정하게 나누세 함께 밥을 나누세 즐겁게 나누세 함께 밥을 나누세 마주보며 나누세 나누는 밥 나누는 기쁨 이 밥으로 힘을 내고 평등세상 건설하세 이 밥으로 다리삼아 해방세상 이룩하세

12/0625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희년을 향한 우리의 고백기도

함께 나누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거듭남의 비밀을 주신 주여, 함께 둘러앉은 만찬의 모습 속에 하느님 나라 의미를 깨닫게 하신 주여, 함께 나누는 성찬 함께 둘러앉은 만찬의 기쁨 속에 그리스도인의 해방과 통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한분이신 그리스도 한분이신 하느님은 하나의 평화...

12/0625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쑥대머리 장단이 한바탕 지나간 뒤 육십대 여자 나와 아니리조로 사설)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 한 대목 조선 여자 환갑이믄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나이라지만 내가 오늘날 어떤 여자간디 이 풍진 세상에 나와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똥배짱으루 사설 한 대목 늘어놓는가 연...

12/0625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호세 리잘이 다시 쓰는 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내 사랑하는 필리핀 피묻은 동아시아의 진주여 처절하게 짓밟힌 동방의 옥토여 서른다섯 내 짧고 팽팽한 생애 식민의 단두대에 주저 없이 바쳤을 때 그대 위대한 혁명을 이뤘듯 그대 억압의 말발굽 벼랑끝으로 몰아냈듯이 조국이여, 독수리 날 듯한 그 기상 다시 펼...

12/0625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아시아의 밥상문화

내가 거처하는 호스 슈 빌리지 아파트에는 종교학을 가르치는 인도인과 비파를 연주하는 중국인 그리고 시를 쓰는 한국인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데요 세 나라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시아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서로 고픈 배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동상이몽을 확인하게 됩니다 ...

12/0607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브로드웨이를 지나며

문짝마다 번쩍거리는 저 미제 알파벳은 아시아를 좀먹는 하나의 음모이다 거리마다 흘러가는 저 자본의 물결은 아시아를 목조르는 합법적 강간이다 지프니 양철지붕 밑에 알록달록 새겨좋은 저 암호문이나 모든 수퍼마켓과 대형백화점에 면밀하게 진열된 양키즘은 세계 인민의 기둥서방을 자처하...

12/0607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악령의 시대, 그리고 사랑

악령의 자본이 시대를 제패한 후 그대는 이제 꿈꾸는 것만으로는 안식의 밥을 갖지 못하네 기다림이라거나 신념 따위로는 그대는 이제 편히 잠들 수 없네 그대가 영혼의 방에 불을 끈 그대가 악령의 화려한 옷자락에 도취된 후 품위 있고 지적이며 인자하고 또 매우 귀족적인 악령의 도술에 ...

12/0607  
고정희 / 밥과 자본주의 - 하녀 유니폼을 입은 자매에게

가차없이 하느님이 팔려가고 성모 마리아가 팔려오는 어느 태양의 나라에는 팔려가는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그대 팔려오는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는 그대가 있네 하녀 유니폼을 입은 그대가 있네 들꽃처럼 티없이 맑고 순한 그대 달의 그대가 있네 그대는 누구인가 하녀라 부르는 그대는 ...

12/0607  
고정희 / 천둥벌거숭이 노래 5

여의도 한강물에 너 떠나간다 눈부신 너 떠나간다 하느님도 모르시는 이 매혹의 이별 내 청춘에 내려꽂는 칼, 전대미문의 길이 뒤따라가고 전대미문의 슬픔이 반짝이며 뒤따라가고 해오라기 황망히 날아가는 날 울대까지 스며드는 빙산을 위하여 열두 대의 첼로가 운다

12/0601  
고정희 /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앞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로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

12/0601  
고정희 / 매맞는 하느님 - 여성사 연구 4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 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구렁에 붙박여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

12/0601  
고정희 / 그대 생각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

12/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