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정호승 / 아버지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 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

19/0307  
정호승 / 봄비

어느날 썪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 두었다

16/0414  
정호승 / 손에 대한 예의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

12/1114  
정호승 / 내 얼굴에 똥을 싼 갈매기에게

고맙다 나도 이제 무인도가 되었구나 저무는 제주바다의 삼각파도가 되었구나 고맙다 내 죄가 나를 용서하는구나 거듭된 실패가 사랑이구나 느닷없이 내 얼굴에 똥을 갈기고 피식 웃으면서 낙조 속으로 날아가는 차귀도의 갈매기여 나도 이제 선착장 건조대에 널린 한치가 되어 더이상 인생을 미...

12/0904  
정호승 / 무인등대

등대는 바다가 아니다 등대는 바다를 밝힐 뿐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당신이다 오늘도 당신은 멀리 배를 타고 나아가 그만 바다에 길을 빠뜨린다 길을 빠뜨린 지점을 뱃전에다 새기고 돌아와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방파제 끝 무인등대의 가슴에 기대어 운다 울지 마라 등대는 길이 아니다 ...

12/0601  
정호승 / 간디에게

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 김치를 먹고 산다 나는 그대의 소금을 넣고 끓인 국밥을 먹고 산다 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 주먹밥을 들고 길을 떠난다 조국의 운명을 만들다가 끝끝내 조국의 운명이 되고 만 그대의 길가에 단식을 끝내고 노란 산나리꽃 한 송이 피었다 진다

11/1005  
정호승 / 가을 연못

경회루 연못에 바람이 분다 우수수 단풍잎이 떨어진다 잉어들이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가까이 올라와 단풍잎을 먹는다 잉어가 단풍이 되고 단풍이 잉어가 되는 가을 연못

11/1005  
정호승 / 가을 일기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 영등포시장 뒷골목 서울여관 숙박계에 내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넣었을 때 창 밖에는 가을비가 뿌렸다 생맥주집 이층 서울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가 더 붉게 보였다 낙엽과 사람들이 비에 젖으며 노래를 부르고 길 건너 쓰레기를 태우는 모닥...

11/1005  
정호승 / 기차

역마다 불이 꺼졌다 떠나간 기차를 용서하라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굳이 수색쯤 어디 아니더라도 그 어느 영원한 선로 밖에서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11/1005  
정호승 / 백로

백로가 강가를 거니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찾아나선 것이지 배가 고파 작은 물고기나 잡아먹으려고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백로가 강 한가운데 한 발로 서서 해가 지도록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 부처님 말씀을 깊게 새기고 있는 것이지 헤엄쳐오는 어린 물고기들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

11/1002  
정호승 /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11/1002  
정호승 /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대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이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11/0116  
정호승 / 밤눈

막차를 타고 대치역에서 내린다 겨울은 막차보다 더 먼저 와 슬슬 밤눈으로 내린다 나는 어둠침침한 은마아파트 사잇길로 걸으며 젊은 신부에게 성체를 받아먹듯 혀를 내밀어 눈을 받아먹는다 한 소년이 가냘픈 어깨에 메밀묵 상자를 메고 내 앞을 지나간다 고개를 치켜들고 불꺼진 창을 향해 메미일 무욱...

11/0116  
정호승 / 진눈깨비

천하고 가벼운 목숨이라도 마지막은 항상 서해를 물들이는 저녁놀처럼 장엄하다 먼바다를 건너와 나룻배의 고물 끝에서 부서져버리는 진눈깨비를 보라 하늘에서 몸을 받았다가 지상에 닿는 순간 스스로 이름을 지워버린 그 짧은 여백이 있어 평생 음지를 살다 간 사람들의 눈동자도 쓸쓸하지 않고 우리의 이...

11/0112  
정호승 / 마음의 똥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

10/0512  
정호승 / 물의 신발

비가 온다 집이 떠내려간다 나는 살짝 방문을 열고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신발이 떠내려간다 나는 이제 나의 마지막 신발을 따라 바다로 간다 멸치 떼가 기다리는 바다의 수평선이 되어 수평선 위로 치솟는 고래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09/0919  
정호승 / 허물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09/0804  
정호승 / 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떠날 때는 내 돈을 모두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에게 단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촛불을 들고 강가로 나가 물고기에게 말한다 물고기는  조용히&...

09/0730  
정호승 /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

09/0730  
정호승 / 지하철을 탄 비구니

그대 지하철역마다 절 한 채 지으신다 눈물 한 방울에 절 하나 떨구신다 한손엔 바랑 또 한손엔 휴대폰을 꼭 쥐고 자정 가까운 시각 수서행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대 옆에 앉아 나는 그대가 지어놓은 절을 자꾸 허문다 한 채를 지으면 열 채를 허물고 두 채를 지으면 백 채를 허문다 차창 밖은 어둠이...

09/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