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정끝별 /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빙하가 녹는 머나먼 북쪽 어디쯤 해안가로 수십만 무리가 몰려온다 해안마저 잃고 살기 위해 절벽을 오른다 한 몸 누일 곳을 찾아 기어오른다 지느러미를 팔다리 삼아 기다란 송곳니를 지렛대 삼아 배밀이 구걸을 하듯 더 기어오를 수 없는 절벽 끝은 찰나의 유빙, 착시의 바다, 그때 허공에 지느러...

20/0729  
정끝별 / 염천

능소화 담벼락에 뜨겁게 너울지더니 능소화 비었다 담벼락에 휘휘 늘어져 잘도 타오르더니 여름 능소화 꽃 떨구었다 그 집 담벼락에 따라갈래 따라갈래 달려가더니 여름내 능소화 노래 멈췄다 술래만 남은 그 옛집 담벼락에 첨밀밀첨밀밀 머물다 그래그래 지더니 올여름 장맛비에 능소화 그래 옛일 되었...

19/1109  
정끝별 / 생각 서치

머그잔에 봉지커피 가루를 붓는다는 게 봉지를 버릴 쓰레기통에 붓고 있다 선배에게 물먹고 선배 뒷담화 터는 문자를 친구에게 보낸다는 게 선배에게 보냈다 약통을 열어 비타민을 손바닥에 던다는 게 생수병을 열어 손바닥에 쏟고 있다 죽어서도 뇌는 줄어들지 않는다니 생각은 죽어서도 생각중일 텐데 ...

19/1025  
정끝별 / 세세세

시간이 너라면 시간이 나라면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가 놓친 엽서 한 장이라면 신데렐라는 어려서 나보다 늦게 늙고 계모와 언니들보다 먼저 춤추고 서리서리 찬바람에 너보다 오래 울고 푸른 하늘 은하수에 무럭무럭 차오르는 하얀 쪽배는 대박일까 쪽박일까 계수나무 한 나무에 도...

19/0930  
정끝별 / 늘 몸

늘 몸에 허공을 품고 사는 일급 도공의 손엔 지문이 없고 일급 바이올리니스트 손끝엔 줄 골이 깊다지 늘 몸에 광야를 품고 사는 일급 축구 선수 발엔 발톱이 없고 일급 발레리나 발가락은 생강뿌리 같다지 늘 몸에 바람을 품고 사는 일급 카사노바의 입술엔 젖과 꿀이 흐른다는데 반평생 고개를 쳐...

19/0930  
정끝별 / 사랑의 슬픔

밤새워 신간과 잡지를 베껴 쓰다가 곧바로 찢어 버려요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아침에는 흰 우유를 저녁에는 검은 우유* 를 마셔요 휘파람을 불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부르르 떠는 건 내가 나를 더 사랗한다는 뜻이죠 왼뺨을 때리면 즉시 오른뺨을 때리세요 내가 나를 처음 만난 날처럼, 안녕! 셀 ...

17/0209  
정끝별 / 토정비결을 보다

正月      입을 병같이 지켜라             병이 몸을 엿본다 二月      고蠱충이 여러 마음...

17/0124  
정끝별 / 저녁에 입들

한 이불에 네 다리 내 다리를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에 휘감기지도 엉키지도 그리 연한 속살에 쓸리지도 않았을 텐데 한솥밥에 내남없이 숟가락 숟가락을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에 물들지도 병들지도 그리 쉽게 행복에 항복하지도 않았을 텐데 한  핏줄에 제 빨대들을 꽂지만 않았어도...

16/1231  
정끝별 / 빈 말

당신을 말하자말자 당신에게서 달아나는 당신 말은 말이 되는 순간 죽는다 죽은 빈말이 빈 말이 되어 달아날 때 당신 말은 당신을 말하면서 당신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지 않는 말에 숨는다 당신과 교합할 수 없는 당신 말은 누구와도 교합하지 않는 희대의 도망자다 당신을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

16/0414  
정끝별 / 춘수春瘦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16/0131  
정끝별 / 지나가고 지나가는 2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

16/0131  
정끝별 / 다리는 달리고 있다

운동회날부터 나는 달리고 있다 너를 지나 집과 담벼락을 지나 어둔 밤길을 지나 전신을 활처럼 제끼고 두 눈을 감고 가슴을 치며 가로막는 횡단보도를 넘어 달릴수록 에워싸는 빌딩숲을 넘어 내 나이를 넘어 달리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재앙의, 넘어지는 것보다 처지는 일이 더 무서웠다 ...

16/0131  
정끝별 / 지루한 누수漏水

마음 원했던 길 예나 지금이나 몸 따르지 못해 깊은 구멍 뱅그르 빠지는 나뭇잎 나 거기 사네 문 밖 지친 몸 아홉 구멍마다 손자욱 선명한 누수(漏水)소리 찌르 찌르 찌르르 누가 알았을까 술김에나 화해하고 마음 밖 몸 엿보며 거울처럼 서로 가여워할 줄 몸 밖 마음이 엿보...

16/0131  
정끝별 / 개미와 앨범

책장 꼭대기에 쌓여가는 앨범들 주저앉을 것만 같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아이 앨범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파르르 바닥에 흩어지는 수천의 개미떼 앨범을 보던 아이가 먹던 비스켓과 함께 닫아두었나 보다 먹이를 찾아 몰려든 개미떼들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

16/0131  
정끝별 / 동백 한 그루

포크레인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한 폐허(肺虛)에 동백 한 그루 화단 모퉁이에 서른의 아버지가 우리들 탯줄을 거름 삼아 심으셨던 저 동백 한 그루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지 옛집 영산포 남교동 향미네 쌀집 뒤 먹기와 위로 높이 솟았던 굴뚝 벽돌뿌리와 나란히, 빗물이며 미꾸라지 가두어둔 ...

16/0131  
정끝별 / 자작나무 내 인생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

16/0131  
정끝별 /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볏은 다리를 감춰주...

16/0131  
정끝별 / 천생연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16/0131  
정끝별 / 날아라! 원더우먼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

16/0131  
정끝별 / 개미와 꿀병

부주의하게 살짝 열어둔 꿀병에 까맣게 들앉았네 개미떼들 어디서 이렇게 몰려들었을까 아카시아 단꽃내가 부르는 저 새까만 킬링필드 꿀에 빠진 개미떼를 몸에 좋다고 뚝, 떠먹는 저 오랜 숟가락들 꿀병에 꽂힌 숟가락을 靑春의 가는 손가락에 쥐어주는 저 시린 입술

1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