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장석남 / 법의 자서전

나는 법이에요 음흉하죠 허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 여러개예요 미소도 가면이죠 때로는 담벽에 붙어 어렵게 살 때도 있었지만 귀나 코에 걸려 있을 때 편하죠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설쳐댈 때가 많지만 만류하진 않아요 그 짓 하려고 어린 시절 고생 좀 한 것들이거든요 ...

20/0729  
장석남 /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한 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마의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뒤란 언덕에 보랏빛 싸리꽃들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해요 종소리 그치면 흰 발자국을 내며 개울가로 나가 손 씻고 낯 씻고 내가 저지른 죄를 펼치고...

19/1109  
장석남 /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네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로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겹겹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19/0403  
장석남 / 치졸당기

이젠 잠자리에 들어서도 반성이랄 것도 없이 그냥 배가 부르면 배가 부른 채로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올해도 몇 그루의 나무들을 사다가 차례도 질서도 없이 계단 앞에 묻어 본다. 사과나무, 배나무, 불두화, 석류, 매화, 넝쿨장미…… 모두가 살아난다면 이 좁은 마당은 얼마나 ...

19/0307  
장석남 / 대숲 아침 해 - 대나무가 있는 방2

창 앞 대숲 아침 해 굶주란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넘치는 불면의 살들을 내어주니 서둘러 먹고는 입술을 핥으며 남쪽으로 돌아가네 대숲 아침 해 서쪽 창 닿기까지 나는 살아서 다시 가슴에 피를 보내 가문 밭을 가꾸다가 또 한 번 서창에 들이닥치는 허기진 눈빛 있으면 서로 핥으며 어둠을 ...

19/0109  
장석남 / 부뚜막

부뚜막에 앉아서 감자를 먹었다 시커먼 무쇠솥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솥 안에 금은보화와도 같이 괴로운 빛의 김치보시기와 흙이나 겨우 씻어낸 소금 술술 뿌린 보리감자들 누대 전부터 물려받은 침침함, 눈 맞추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도 없이 목을 늘려가며 감자를 삼켰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

17/0703  
장석남 / 봄 손님

- 주유 시편1    단골 침 맞는 집, 앞 못 보는 침술사님께서 꽃철이니 꽃구경도 많이 다니시라 인사하시네 목이 쉰 손님은 그만 문득 봄 손님을 맞고 말았네 아니할 수가 없어 저녁 내내 새 손님과 술잔 나누네 먼 길 온 손님이니 한 다리 정도는 가슴에 얹어 무게를 칭찬...

17/0610  
장석남 / 높새바람 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이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

17/0607  
장석남 / 빈 방

- 남지암(南枝庵)을 기록함 아홉 개의 계단을 가진 방 왼쪽엔 신(神)이 사는 산이, 오른쪽엔 세속(世俗)이 아홉 층 마당으론 저승을 아는 호수(湖水) 나는 그중 하늘 쪽에 가깝고 싶지만 나는 하늘에서 사는 사람이 되지 못하므로 술을 마시고 죄를 삼키고 꿈을 부른다네 나는 여럿의 ...

17/0530  
장석남 / 작약

빈방에서 속눈썹 떨어진 걸 하나 줍다 또 그 언저리에선 일회용 콘택트렌즈 마른 걸 줍다 이 눈썹과 눈으로는 무엇을 보았을까 이 눈썹과 눈의 주인을 생각한다 눈물 위에 이걸 띄워서 무엇을 보았을까 작약싹 올라온다 작약꽃이 피어 세상을 보다가 떨어질 것을 생각한다 작약 겹겹 꽃잎 ...

17/0208  
장석남 / 카메라를 팔고

- reica m6 놀던 카메라를 팔고 눈이 멀었네 내 푸른 피의 사치였던 물건 첫아이의 똥 누는 표정을, 그 동생의 부러진 앞니의 웃음을, 그 에미의 아직 밝던 고단을 찍던 설렘의 여닫이 문 셔터 소리는 아직 귀에 남아 진주가 되네 이제 가까운 사물은 흐리고 흐리니 가까운 일...

17/0124  
장석남 /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지 않던가. 바다로 간 것은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넋은 결국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던가. 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 때로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오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 수평 너머의 바다...

16/0425  
장석남 / 여름의 끝

여름의 끝으로 물소리가 수척해진다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간다 나리꽃과 다알리아를 어깨에 꽂고 다녀간 구름도 이제 어느 집 內殿의 자개장에서나 보리라 노예와도 같이 땀을 쏟아가며, 진땀을 닦아가며 타고난 손금을 파내던 일을 이젠 좀 쉬리라, 여울목 여울물 소리가 수척해진다

15/0926  
장석남 / 동지(冬至)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12/1231  
장석남 / 맨발로 걷기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12/1207  
장석남 / 수묵水墨정원 9

-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네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

12/1115  
장석남 / 가여운 설레임

내가 가진 돌멩이 하나는 까만 것 돌가웃 된 아기의 주먹만한 것 말은 더듬고 나이는 사마천보다도 많다 내 곁에 있은 지 오래여서 둥근 모서리에 눈(目)이 생겼다 나지막한 노래가 지나가면 어룽댄다 그 속에 연못이 하나 잔잔하다 뜰에는 바람들 가지런히 모여서 자고 벚꽃 길이 언덕을 넘어갔다 하...

12/1115  
장석남 / 소묘 1

지금 그 섬마을엔 참나리꽃이 피었을 것이다. 둥굴레꽃이 피었을 것이다. 마을 미루나무엔 지난 겨울 날리다가 걸린 연(鳶)살들이 돋는 새잎에 가려지고 있을 것이다. 뚱뚱감자꽃이 백옥 같은 말씀들을 피워물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둥굴레꽃은 피어서 뚱뚱감자꽃들은 피어서 환하지 않아도 ...

12/1115  
장석남 / 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

12/1101  
장석남 / 어떤 가을 날

1 소금장수도 지나갔다 사과장수도 지나갔다 햇사과라고 했다 가을 대낮, 신발끈을 고쳐매듯 뜰에 햇볕들 서서 일부는 앉아서 있다 벌레 먹은 모과 몇 개 내 손길의 上部에 모여 있다 처음 보는 사랑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무 한 그루를 옮겼다 조금 기울어진 것 같아 다시 가 똑바로 세우고 뿌리 ...

12/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