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이형기 /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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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 맹물

물을 마신다 맹물이다 아무리 마셔도 맹물 그냥 맹물이다 안으로 들어간 물은 다시 밖으로 뿜겨져 나온다 뿜겨져 나오는 건 보니 뜻밖에도 불길이다 내 뱃속에 숨어있는 일곱난쟁이가 그 불길을 뿜는다 불길이 이번에 재로 바뀐다 재는 가루 가루된 재가 소리도 없이 내려 쌓인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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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 악어

악어는 왜 하필 악어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악어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겠다 그 눈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용용죽겠지가 숨어 있다 용용죽겠지하고 웃는 악어 그 웃음을 단지 눈물로만 드러내는 악어 악어의 눈물이 뿌려진 오솔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악어 목에 딸랑딸랑 방울을 ...

16/0131  
이형기 / 소리

살을 에는 아픔이 순간 온 몸속에 흐른다 그리고 나는 캄캄한 어둠속에 묻힌다 그 어두움에 대고 누가 돌 하나를 던진다 이윽고 툭하고 떨어지는 어둠의 밑바닥 소리한테 소리가 빨려들어가서 침묵이 되는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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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 나무 위에 사는 물고기

물고기들은 물 속이 아니라 나무 위에 산다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고기 그러나 바람에는 세찬 강풍도 있어서 죽기살기로 나무에 매달리는 물고기 그리고 물고기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 허망함 애초부터 그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래봤자 그게 뭐 대순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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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 풍선 심장

심장을 만듭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색칠을 합니다. 원래의 심장은 지난 여름 장마때 피가 모조리 씻겨 빠졌습니다. 그리고 장마 뒤의 불볕 속에서 내 심장 빈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허물처럼 까실까실 말라버렸습니다.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심장 구겨 뭉쳐 쓰레기통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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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 감기

미열 6도 7분의 홍조 더운 이마를 식힐까보다. 아스피린과 산탄 엽총 그리고는 가벼운 흥분을 곁들인다. 가늠자 위에서 떨고 있는 새 한 마리. 방아쇠를 당기면 그러나 새는 이미 날아간지 오래다. 빈 총소리만 요란하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감기를 앓는 기침 소리 미열 ...

16/0131  
이형기 /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

16/0131  
이형기 / 일기예보

한겨울 심야의 라디오 일기예보는 듣기 전에 이미 가슴이 설렌다. 바람은 북동풍 초속 이십오 미터 심술로 퉁퉁 부은 천이십 밀리바의 저기압을 등에 업고 오호츠크 해로 지금 눈보라를 몰고 간다. 모든 선박의 운항 금지를 명하는 폭풍경보 세상을 온통 꼼짝달싹 못하게 계엄령처럼 숨죽여 놓고 거동이...

16/0131  
이형기 /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

16/0131  
이형기 / 황혼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 같은 목청으로

16/0131  
이형기 / 

너는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번들번들 윤이 나는 긴 몸뚱이의 S자 만곡 교태를 부리면서 그러나 그것은 유혹이 아니다 차라리 현기증 삼복 더위 한복판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차가운 섬광 그때 너는 잠시 멈춰서서 가늘게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댄다 불꽃처럼 또는 불꽃 속에 숨어든 얼음의 혼...

16/0131  
이형기 / 석류

이 가을 석류가 익는다 익어서 반쯤 벌어져 있다 실은 지난봄 어느 시인의 대뇌 좌우반구 그 뇌막에 퍼지기 시작한 작은 물집들 물집 모양의 종양들이 하나 가득 알알이 익어서 석류처럼 절로 벌어진 이 가을 사람들아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라 정원의 석류나무 그늘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흔들흔들...

16/0131  
이형기 / 밤바다

날개 상한 갈매기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솟구쳐 오르려고 그러나 이내 주저앉아버리는 밤바다 파도의 좌절. 깨어보면 베개엔 끈끈하게 소금기가 배어 있다. 멀쩡한 사지가 상한 날개보다도 무력한 나날의 뒤척이는 선잠.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짖고 있다. 방파제 너머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검은 그림자 ...

16/0131  
이형기 / 칼을 간다

칼을 간다. 칼을 가는 소리 서걱서걱 이따금 날을 비춰보는 달빛. 지난 여름 호열자가 휩쓸고 간 마을에 이제사 돌아온 1년 만의 가을이다. 칼을 간다. 죽은 자 곁에 살아남은 자의 죽음이 있다. 밑바닥이 없는 가을의 밑바닥 눈이 있다. 칼을 간다. 칼을 갈 듯 그 눈을 간다. 이따금 날을 비춰...

16/0131  
이형기 /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1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밤에 또한 잠을 못 잔다. 국산 수면제 스리나 그 매끈매끈한 하얀 정제 속에는 꿈이 스며들 틈이 없고나.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지만 때로는 너무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을수록 하얀 정제를······ 아아 내게서 꿈을 내쫓고 복용, 한 시간 전후에 동물적인 수...

16/0131  
이형기 / 겨울의 비

모조리 떨고 나니 온다 겨울의 비. 이젠 낙엽도 질 것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 빈 들판엔 남루를 걸친 계절의 신이 혼자 웅크리고 있다. 머지않아 잠들 것이다. 그리고 묻힐 것이다. 그렇게 한 소절을 매듭짓는 의식······ 눈이 내릴 걸 생각한다. 눈물을 뿌릴 만도 하지만 눈물이 아닌 겨...

16/0131  
이형기 / 소묘

산에 올 때마다 가을은 한 겹씩 옷을 벗는다. 잘 익은 그러나 욕정엔 물들지 않은 그녀의 육체 팽팽한 탄력이 곡선에 눌려 더욱 뚜렷하다. 말끔히 씻긴 眼睛 눈으로도 맡는 향긋한 내음 어떠한 장식도 完美 앞에서는 남루에 불과하다. 차라리 낙엽처럼 떨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해마다 그녀의 나...

16/0131  
이형기 /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

16/0131  
이형기 / 

그대의 사랑을 나는 이 손으로 느낀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든 한 떨기 꽃, 꽃 같은 손이다. 깨어나면 어느덧 턱밑에 수염이 자란 손, 노동하는 손이다. 대폿집에서 빈대떡을 집으며 눈보라 치는 밤에 호호 입김을 불며 그 손을 펴들고 받드는 중량, 휘어지는 반동, 그러나 내게 남은 체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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