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이성복 /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창살 뒤에서 울음 울며 크게 자란 나의 모든 돌과 함께 - 파울 첼란, 「쉽볼렛」 붕대로 머리 싸맨 아폴리네르처럼 이끼 낀 돌이 있다. 애초에 괴로울 ‘苦’ 자를 닮은 돌, 이미 괴로웠던 것 아니고 무작정, 무한정 괴로울 돌, 제 옆의 누구와도 제 괴로움 공유할 수 없다고 겨드랑이까지 팔 치켜...

20/0730  
이성복 / 밤이 나에게 빌려준 힘으로

밤은 오고 싶지 않은가 보네 그대가 오지 못하도록 내가 가지 못하도록.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절망적인 사랑의 가셀라」 밤은 버선코 같은 달의 수레를 모네, 얼굴에 검버섯 핀 낮에게 가려고, 하얗게 잠든 귀밑머리 물들여 주려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달의 수레 걸리면 밤은 우리 집에 들...

20/0730  
이성복 / 밤은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 폴 엘뤼아르, 「그리고 미소를」 밤은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시든 잎에 물을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어두운 잎새들이 모가지에 닿는 느낌 밤이 싫어할까. 밤은 갈아놓은 마처럼 끈적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

20/0730  
이성복 / 검다는 것은 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흐르지 않는 물 속에 침몰하는 선박과 같았으니까, 나는 죽은 사람처럼 물 밖에는 없었으니까. - 폴 엘뤼아르, 「이곳에 살기 위하여」 검은 물 고인 스텐 강판은 막소주 부어도 지워지지 않고, 장의차 기사는 연신 쌍욕을 했다. 검은 물, 축제 전날 밤 콘크리트 맨바닥에서 불타 죽은 물. 경...

20/0730  
이성복 / 완전 방수의 고무장갑과 달리

물고기, 헤엄치는 사람, 배들은 물에 변화를 일으킨다 - 폴 엘뤼아르, 「물고기」 헤엄치는 물고기를 완벽하게 감싸는 물, 물은 물고기 전신에 물 마사지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귤도 그렇다. 여드름 자국 송송한 귤 껍데기는 젤리 같은 과육을 완벽하게 감싼다. 완벽하다는 것은 제 속의 것들이 ...

20/0730  
이성복 / 이 들녘에서 누가 우는가

내가 말했잖아 이 들녘에서 엎드려 울게 날 좀 제발 내버려둬.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아!」 이 들녘에서 밤은 그을음처럼 오고, 마른 쑥부쟁이 너의 목은 쉽게 꺾어진다. 이 들녘에서 네가 운다고 하지 마라. 오래 전부터 들녘은 제 울음을 울고 있었다. 오래 전에 다친 무릎처럼, 오래 ...

20/0730  
이성복 / 보채지 좀 마라

우리 숨쉴 때마다, 안 보이는 강물처럼 죽음은 희미한 탄식 소리 지르며 허파 속으로 내려간다 - 샤를르 보들레르, 「독자에게」 수레바퀴가 돌아도 중심은 돌지 않는다. 테두리가 돌면 중심 축은 나아간다. 중요한 건 이뿐, 테두리가 중심 축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테두리가 돌기에 중심 축이 나아...

20/0730  
이성복 / 삶과 죽음이 불편한 자여

나도 어느 날 그들처럼 떠나리라. - 자크 프레베르, 「축제」 이 세상에서 사람은 상록수 방식으로 사는가, 활엽수 방식으로 사는가. 학생들한테 물으면 열의 아홉은 활엽수 방식이라 한다. 그럴까. 가을 되면 다리털 빠지고, 머리카락 다 빠져 대머리 되고, 가을 되면 서울 사람들 다 죽어 가는가....

20/0730  
이성복 / 말 한 마디가 척추를 곧추세운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만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디스크를 고치는 어느 물리치료사의 치료시간은 고작 일 분. 그가 하는 일은 뼈마디 하나씩 빽 잡아 비...

20/0730  
이성복 /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는 것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 내내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을 흔들었네. 이제 진실 속으로 시들 수 있으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옥수수에 기생하는 스트라이거 균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스트라이거 균은 ...

20/0730  
이성복 / 봉분을 만들지 마라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장미꽃으로 하여 그저 해마다 그를 위해 피게 하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합천의 도예가 김종희 선생은 돌아가실 때 봉분을 만들지 마라 했다. 짐승들 다니는 데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푯말은 땅에 묻어 묫자리만 알리라 한 것도 사람의 몸이 ...

20/0730  
이성복 / 천사들의 판례집

행여 내 울부짖은들, 뉘라 천사들의 계열에서 날 들으리? 하물며 어느 천사가 있어 불현듯 나를 가슴에 안아준다 한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1」 그러니까 우리 사는 세상은 천사들의 판례집. 지방법원 고등법원 거쳐 대법원까지 가는 사건도 있고, 중간에 농간치는 변호사 사무...

20/0730  
이성복 / 그저 삥 둘러싸기만 해도

무엇 때문에 캄캄한 밤이 내 입 가운데에서 부풀어오르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 파블로 네루다, 「어디냐고 묻는다면」 생각 같아서는 수백 마리 영양들이 뿔뿔이 달아니지 않고 그저 삥 둘러싸기만 해도, 대여섯 마리 들개에게 물어뜯기는 어린 영양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쉽...

20/0730  
이성복 / 굵은 소금 등에 처바르고

어떤 여인들은 파도와 같다. 그녀들의 젊음을 모두 바쳐 솟구쳐 올라 도저히 되돌아올 수 없는 높이의 바위를 뛰어넘고 만다. - 르네 샤르, 「어떤 여인들은」 어떤 여인들인가, 굵은 소금 등에 처바르고 일생일대의 솟구침을 준비하는 그녀들. 고통은 그녀들의 입이 닫히지 않도록 마른 나뭇가지 ...

20/0730  
이성복 / 갑자기 베란다 뒤쪽에서

그러나 하늘의 고요함이 지금 당장 눈앞에 깨어지기를 바라며 잠 안 자고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헛일이 될 것이다. 오늘밤도 고요함은 계속될 것 같아 보인다. - 로버트 프로스트, 「우연히 성좌를 쳐다보면서」 갑자기 베란다 뒤쪽에서 악, 악 비명 소리 들려 슬리퍼 끌고 나와보니, 장바구니...

20/0730  
이성복 / 골목 안 낙원 밥집 딸내미

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잠기고, 새벽은 한낮이 된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 로버트 프로스트,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골목 안 낙원 밥집 딸내미는 웃는 상이다. 방 안엔 오십대 후반 아줌마들의 계모임, 다단계 판매 얘기로 언성 높인다. 주방엔 가득 쌓인 조기 새끼...

20/0730  
이성복 / 짓던 옷 마저 못 짓고

떡갈나무 대문이여, 누가 너를 부수었는가? 내 온화한 어머님은 돌아오실 수 없다. - 파울 첼란, 「백양목」 하늘의 무서운 새가 내 어머니 물고 간다. 울다가 웃다가 짓던 옷 마저 못 짓고, 내 어머니 절도 못 받고 간다. 자다가 말다가 짓던 밥 마저 못 짓고, 내 어머니 신발도 못 신고 간다. ...

20/0730  
이성복 / 우리 애기 옷 하나 해주지

나는 생각한다, (···) 다시는 영원히 도로 찾지 못할 것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 샤를르 보들레르, 「백조」 우리 어머니 사촌 여동생, 교사였던 남편은 인민군 노래 가르치다 붙들려가 소식 없고, ‘오빠, 우리 애 아빠는 어떻게 됐겠어?’ ‘죽었겠지’ 무심한 오빠 말에 한 달을 못 앓고...

20/0730  
이성복 / ‘싫어여’ 그건 상주 말이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의 어머니」 나보다 잘난 사람 있는 자리 가기 싫어여, 여든여섯 우리 어머니의 조심스런 고백. ‘싫어여’ , 그건 상주 말이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은 ...

20/0730  
이성복 / 소녀들 철없다

저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목숨을 향하여 이렇게 보채임을 굽어보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리아께 드리는 소녀들의 기도」 소녀들 철없다. 무슨 일 한번 있으면 그만이지 또, 또 자꾸 보챈다. 전에 우리 아이 놀러갈 때면, 버스 언제 와? 언제 도착해? 언제 밥 먹어? 언제 집...

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