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이문재 / 날씨가 사라지다

- 산책시 4 날씨가 사라졌어요 날씨는 이제 없습니다 날씨는 기상청 예보에만 있지요 전날 밤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날씨는 잠깐 보였다가 지나갑니다 방송이 체감온도 영하 15도라고 일러 주면 사람들은 그 순간에 추위를 다 겪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튿날 아침에는 그 다음 날의 날씨를, 아니...

17/0610  
이문재 / 별똥별

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늘 손에 칼을 쥐고 부욱――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

17/0209  
이문재 /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

16/0413  
이문재 / 이명

애드벌룬에서 지하도 바닥에 붙은 양말 광고까지 이 거리는 소리친다 두 눈과 귀를 닫아도 거리는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 저 인구 시계로부터 어제의 교통사고 숫자까지 텔레비젼은 물론 자명종까지 이 도시는 늘 외치거나 재잘대고 있다 저것들을 멀리하는 그때가 죽음이다

13/0203  
이문재 / 길섶

사랑이 이 길로 간다 한다 등롱초 심어 이 길 밝히려는데 온갖 바퀴들 먼지로 뒤덮는다 사랑의 맨 처음이 이 길로 지난다 한다 등롱 걸어 깨끗한 손뼉 마련하려는데 왼갖 현수막들 터널처럼 자욱하다 사랑의 맨 뒤도 이 길이면 볼 수 있다고 등롱초 따다가 사랑이 남기고 간 것들 불 밝히려 했는데 난데...

13/0203  
이문재 / 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민들레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 왔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

12/0715  
이문재 / 마음의 지도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

12/0715  
이문재 / 마음의 오지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이 더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

12/0715  
이문재 / 소금창고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

12/0715  
이문재 / 일본여관

기러기떼 날아가자 초저녁 하늘에 문득 화살표가 생긴다 저 팔랑거리며 가물거리는 표지가 맨 처음의 기억을 가리키는 것일까 전철역을 빠져나오자 더욱 어두워진 사람들이 광장 한켠에서 자전거를 찾고 있다 오늘처럼 날 선 11월 초승달을 바라보면 이가 시리던 때가 있었다 시장통에서 빠져나...

12/0715  
이문재 / 꽃멀미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이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 뿌린 듯한 ...

12/0715  
이문재 /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

12/0715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

12/0715  
이문재 / 혼자만의 아침

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 뜬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정오가 오기 전에 알았다 소금은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소금은 빛으로부터 가장 ...

12/0715  
이문재 / 손은 손을 찾는다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해서 온종일 누워 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

12/0715  
이문재 / 내 안의 식물

달이 자란다 내 안에서 달의 뒤편도 자란다 밀물이 자라고 썰물도 자란다 내 안에서 개펄은 두꺼워지고 해파리는 펄럭거리며 미역은 더욱 미끄러워진다 한켠에서 자라도 자란다 달이 커진다 내 죽음도 커지고 그대 이별의 이후도 커진다 죽음의 뒤편도 커지고 이별 이전도 커진다 뿌리...

12/0715  
이문재 / 마음의 발견

마음은 늘 먹이 쪽에 가 있다 먹고 나서도 매양 먹이 타령이다 마음에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마음은 또다른 마음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음이 사회간접자본이었으면 좋겠다 공기나 별빛 또는 공룡시대처럼 거기에서 마주친 두살배기 아이의 웃음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

12/0715  
이문재 / 정말 느린 느림

창 밖에, 목련이 하얀 봉오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목련꽃 어린것이 봄이 짜놓은 치약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런, 늦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양치질 할 새도 없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뿌리들은 있는 힘껏 지구를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태양아래 숨어 있는 꽃은 없었습니다...

12/0715  
이문재 / 지문指紋

봄 풀 꽃, 저 햇빛의 작은 지문들 5월 늦은 오후, 깨끗하게 늙어가는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민들레들 길섶에서 달구어져 있다, 햇살이 지그시 민들레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노오란 이 빛의 방울들 작은 소리를 터뜨리며 번져나간다 세상에 같은 지문은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직도 ...

12/0715  
이문재 / 모든 배는 길을 싣는다

난바다에 나가 알았다, 벌써 그대 발 사이즈가 생각나지 않던 무렵이던가, 수평선을 끊어내지 않는 섬은 섬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바다들 두려워한 까닭은, 그 난바다에 한치의 빈틈도 없었기 때문. 수평선이 물 아래 깊은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 그렇게 내가 바다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 것...

1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