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이면우 / 동물왕국 중독증

TV 모니터 속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도망치는 사슴을 사자가 쫓아다녔다 나는 사슴이 사자 속으로 벌겋게 들어가는 걸 본다 아니 저런, 꼭 제집 대문 들어가듯 하네 입이 문이면 송곳니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 떠미는 다정한 손 아니지 지금 사슴이 사자로 변하는 중이잖아...

13/1030  
이면우 / 여우비

구두 베고 한 사내 잠든 간이역 벤치 은행나무는 푸른 하늘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여우비 지나는 역사驛舍 추녀 아래 몇몇 이들 일어나라 일어나라는 눈짓도 그 사내 못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곧 기차에 실려 꿈꾸듯 먼 길 떠날 게다 은행나무 우산 쓴 사내가 맨발로 구름 위 걷는 동안 머리...

09/0322  
이면우 / 북과 북채

시 왜 쓰느냐고 묻는 이에게 음악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오월 국립대학 따끈한 잔디밭 움켜 쥔 홍차 캔의 서늘한 감촉 서쪽 구름이 목화밭처럼 부푸는 걸 보다가 북 이야긴데...북이 있으니 쳐보는 거지 평생 제대로 된 소리 한번 내봤으면 좋겠다 시 공부한다는 여자 대학원생 둘과 헤어져 내...

09/0322  
이면우 / 그 나무, 울다

비오는 숲 속 젖은나무를 맨손으로 쓰다듬다 사람이 소리없이 우는 걸 생각해봤다 나무가 빗물로 목욕하듯 사람은 눈물로 목욕한다! 그 다음 해 쨍하니 뜨면 나무는 하늘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고 사람은 가뿐해져서 눈물 밖으로 걸어나오겠지

08/1117  
이면우 / 스와니 강 건너기

강 건너는 송전선에 대고 저기다 흰 빨래 푸지게 해 널면 단박에 마르겠다던 여자와 강 건너 외딴 오두막 살림 십 년 못 채웠습니다 남자는 강 건너는 송전선을 보며 저기다 도르래 걸고 두 손 꽉 움켜잡고 단숨에 미끄러지면 좋겠다며 흰 구름 푸른 하늘 아래 가끔 쪽배 저어 마중 나오는 여자를 기...

08/0430  
이면우 / 교대근무자

먼 길 걸어온 내게 저녁은 의자를 내어줍니다 그런데 의자에 아직 온기가 남아 방금 당신이 길 떠난 줄 알았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허공에 던져진 둥근 공 같은 지구를 떠올립니다 그러면 잇따라 애달프고 감미롭고 웅장한 음악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요 그 음악이 아니면, 당신이 어떻게 밤내 먼 길...

08/0430  
이면우 / 가뭄

멧비둘기 밤꿀냄새 진동하는 숲 쪽으로 날아간다 두 갈퀴발 왕개구리 꽉 움켜쥐고 날개 펄럭펄럭 가라앉다 솟구치다 안간힘 써 날아간다 감자밭머리 먼지 풀석대며 괭이질하던 사내 꽥꽥대는 왕개구리와 눈 딱 마주쳐 괜히 딴 데 둘러볼 만큼 가까이 날아간다 멧비둘기 악착같이 가야하는 저 숲 어...

08/0430  
이면우 / 화염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

08/0430  
이면우 / 메이드 인 차이나

이 주머니칼은 국경을 넘어왔다 나는 금 천 원의 주머니칼을 몇 번 펴고 접으며 낮은 추녀 끝 연통이 흰 연기 퐁퐁 내뿜는 낯선 거리로 넘어갔다 말채찍마냥 쌩쌩한 북서풍 안고 무악재 너머 개성 평양 신의주 지나 바다 같은 강 건너 연탄난로 벌겋게 단 작업장까지 갔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 프레스는...

08/0430  
이면우 / 손공구

  열일곱, 처음으로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과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

08/0205  
이면우 / 그 젖은 단풍나무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은 ...

08/0124  
이면우 / 쓸쓸한 길

왕벚나무 아래 젊은 남녀 공부하러 오가는 길 나는 손공구 쥐고 일 다녔다 먼저 흰 피 같은 꽃 피고 살점 뚝뚝 패이듯 꽃 진다 그 위로 자동차 달리면 꽃잎들 솟구쳐 되풀이되는 생 음미하듯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알 수 없는 힘이 세상은 참 아름답다고 혼자 중얼대게 하는 봄 바람 불던 밤, 꽃잎들 ...

08/0124  
이면우 / 스뎅27종은 아침에 빛난다

가족계획 실패한 돌이네 아침밥상 둘레 새끼돼지 젖 파듯 옹기종기 머리 박고 후르륵 쩝쩝 엣취 냠냠 요란딱딱 엄마 아빠 말고 줄줄이 일곱, 밥 된장찌개 김치 깍두기 청태무침 깡그리 비워내고 아, 마지막 몽고간장 종지까지 말려 부친다 물 마시고 서둘러 공사장 공장 공장 공장 학교 학교 또 학교, ...

08/0124  
이면우 / 구름 만드는 남자

흰 구름과 쌀밥은 닮았다 어려서 구름이 자꾸 몸 바꾸다 돌연 사라지는 걸 꿈꾸듯 지켜보는 내게, 아버지 너, 게으르면 힘든 밥 먹는다.    보일러 점화 삼분 뒤 굴뚝을 본다 탄산가스와 습증기로 된 흰 구름이 뭉게뭉게 차가운 하늘 속으로 반듯이 올라간다 내가 만든 구름 참 많이...

08/0124  
이면우 / 그 자리

그 자리에 다시 가보셨는지요  둘러보다 너무 아파 손으로 꾹 눌러준 가슴 같은 자리, 가진 적 있습니다 마음이 불어 간 곳 저녁 옥수수밭처럼 서걱댑니다 당신은 다 저녁 때 옥수수 이빨 빠지듯 서러운 그 자리에 가 오래 울어보셨는지요 되짚어 가, 뭘 두고  왔나 서성대...

07/1128  
이면우 / 술병 빗돌

그 주정뱅이 간경화로 죽었다 살아 다 마셔버렸으니 남은 건 고만고만한 아이 셋. 시립공동묘지 비탈에 끌어 묻고 돌아 나오는데 코훌쩍이 여섯살 사내애가 붉은 무덤 발치에 소주병을 묻는다 그것도 거꾸로 세워 묻는다 그거 왜 묻느냐니까 울어 퉁퉁 분 누나들 사이에서 뽀송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

07/0915  
이면우 / 바다와 뻘

밤게 짱망둥어 갯지렁이가 목숨을 괴발새발 뻘 위에 쓴다 온몸 밀려 끌며 쓴다 그러면 바다가 밀려와 말끔히 지운다 왜 하루 두 번 바다가 뻘을 지워버리는지 나이 쉰에 겨우 알았다 새로 살아라 목숨 흔적 열심히 남겨라 그러면, 그러면 또 지워주겠다 아아아 외치며 바다 막무가내 밀고 들어...

07/0915  
이면우 / 부전자전

일찍이 성욕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고 올라와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꼬집어 죽여줘야 했다 나이 쉰 되며 비로소 피가 맑아졌다 속으로 휴우, 한 숨 쉬며 안도한다 이젠 여자를 무심히 볼 수 있게된 거 다 그런데 열두살 된 아이, 제 고추가  너무 자주 빳빳해...

07/0915  
이면우 / 빵집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이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

07/0915  
이면우 / 입동

무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꼬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 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줄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

07/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