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이기철 / 무엇을 바라고

추운 길가의 민들레와 마가렛꽃의 슬픔을 잊고 지내는 날이 많아진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읽으면 따뜻한 온돌방이 미안하다. 그는 언어의 매질을 나에게 가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매질에 몇 번씩 몸을 사리면서 행간을 조심스레 읽어내린다.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없...

20/0729  
이기철 / 여적

나무는 제 몸속 어디에 진홍을 숨겨두었다가 봄이면 한꺼번에 저 많은 꽃송일 터뜨리는 걸까 가난은 숭고한 것 들꽃이 백 년 동안 한 벌 옷만 입고 나오는 것 산을 사랑하는 것은 벼랑 끝 바위를 끌어안은 한 그루 소나무다 새의 지혜는 나무 위의 가장 고요한 곳에 둥지를 트는 것 도랑물이 끈...

19/1109  
이기철 / 마음이 출렁일 때마다

나무의 체취를 아는 새들은 저녁이면 제 나무로 돌아온다 그땐 시보다 아름다웠던 지난여름 장항선 기차 시각표를 다 잊어버린다 군불 땐 방처럼 따뜻한 가슴의 사람한텐 옛날 읽은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한 줄 읽어 주고 싶다 그런 햇빛 그런 공기 그런 풍경 속에 들어가 한 해의 옷을 다 벗어...

17/0703  
이기철 / 아름다움 한 송이 부쳐 주세요

부탁합니다, 신혼여행같이 설레는 시 한 편 부쳐 주세요 언어로 쓴 시 아닌 정서로 쓴 시 말입니다 기운 자리 없는 무명옷쯤이면 되겠지요 내 몸은 바늘 자국 투성이라도 마음은 갓 돋은 상추 이파리입니다 가장 나직한 시를 읽고 있을 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면 내다보지 마세요 틀림없이 창가에 ...

17/0703  
이기철 / 누가 나에게 쓸쓸을 선물해 다오

온종일 이름 모를 꽃을 심고 꽃삽을 씻어 볕살 아래 놓아두고 죽은 샐비어 꽃받침을 모질게 끊어 내고 버려진 베고니아 화분을 돌 위에 얹어 놓고 어둠이 안심하고 내 곁으로 다가오도록 어둠의 허파 속으로 대문을 풍금처럼 열어 놓고 오지 않은 내일의 아름다움을 혹은 가 버린 어제와의 별리를 피...

16/1231  
이기철 / 나무, 나의 모국어

1 돌이 따뜻해질 때까지 돌 위에 앉아 시를 쓴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바삐 일손을 다듬는 햇살 바람이 난생처음 배운 말을 하며 지나가면 나무에도 조금씩 젖니가 돋아 이파리가 음계를 물고 제 몸 위에 떨어지면 개울물은 비로소 청춘을 회복한다 일생을 서 있는 나무들은 발이 부었지만 ...

16/0414  
이기철 / 울음의 영혼

울음이 작별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작별은 모든 울음을 다 이해한다 울음 곁에서 울음의 영혼을 만지면서 나는 최초의 금강(金剛)을 배웠다 울음의 방식은 고독이다 고독은 너무 많이 만져서 너덜너덜해졌다 눈물은 울음이 남겨놓은 흑요석 눈물은 고독보다 훨씬 깊은 데서 길어 올린 샘물이다 울음 하나...

15/1210  
이기철 / 정신의 열대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으리 오늘 아침 배춧잎처럼 빛나던 청의(靑衣...

15/0926  
이기철 / 사랑의 기억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

15/0308  
이기철 / 고향

신발을 벗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내를 건너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불과 열 집 안팎의 촌락은 봄이면 화사했다 복숭아꽃이 바람에 떨어져도 아무도 알은 체를 안했다 아쉽다든지 안타깝다든지 양달에는 작년처럼, 너무도 작년처럼 삭은 가랑잎을 뚫고 씀바귀 잎새가 새로 돋고 두엄더미엔 자...

15/0308  
이기철 / 가장 위대한 시간, 오늘

아침이 제 손수레에 어제의 헌옷을 담을 때 평화주의자인 나무들의 머리카락 위로 오늘이 온다 희망이라는 말에도 집들은 펄럭이지 않고 푸른 나무들의 잎이 손 흔든다 사랑하라 말 할 때의 둥근 입술처럼 하루의 손이 큰 수레에 오늘을 싣고 온다 그 나무들의 평민국으로 소풍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15/0308  
이기철 / 그늘은 나무들의 생각이다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12/1130  
이기철 / 시 읽는 시간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

12/0712  
이기철 / 얼음

얼마나 기다렸으면 가랑잎마저 껴안았겠느냐 얼마나 그리웠으면 돌멩이마저 껴안았겠느냐 껴안아 뼈를, 껴안아 유리를 만들었겠느냐 더는 헤어지지 말자고 고드름의 새 못을 쳤겠느냐 내 사랑도 저와 같아서 너 하나를 껴안아 내 안에 얼음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리하여 삼월이 올 때까지는 한 번 낀 깍지 ...

12/0203  
이기철 /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

11/1012  
이기철 /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

어떤 사소한 글이라도 그에겐 혈흔이다 어떤 글은 병이 되어 그의 생을 쉬이 저물게 한다 아무리 작가는 말을 만드는 사람이라 해도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만든 말이 아니다 가슴으로 한 말이다, 피 뱉듯 한 말이다 동서고금의 시인 작가들이 다 생을 채색하며 살다 갔지만 그들이 남...

09/0823  
이기철 /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

09/0719  
이기철 / 어떤 시간이 금(金)이 되나

피는 꽃 깔고 앉아 노래한 날 있었다 연필 깎아 흰 종이에 은빛 언어들로 편지를 쓴 적 있었다 마음 새지 않게 단추 꼭꼭 여미며 새벽이 올 때까지 푸른 말 불러내어 책받침에 글자 배도록 눌러 쓴 적 있었다 봄풀처럼 일어서서 맞는 순금의 아침, 비단 놀 이제는 추억의 재가 되지 않도...

09/0719  
이기철 / 서정의 유형지에서

벼랑에 도라지꽃 피고 서정시가 씌어진다는 것이 아직은 위안이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땅에서 혼자 노래 부르는 사람이여 목이 아픈가 사람의 어깨에 싸라기 같은 햇살 내리고 공장의 굴뚝에도 달빛은 희다 대리석은 지층의 꿈에 젖고 강물은 나보다 먼저 내일에 닿는다 나는 삶에 대해 불온...

09/0719  
이기철 / 부석사

오름길로 한층 완강해진 길들이 마음의 극치를 내보이고 있다 길들은 절정에 닿으면 제 몸을 버린다 팽창한 극한의 마음을 풀어내는 지상에서 가장 먼 풍경소리 어제는 제 어제와 헤어지는 일에 열중하고 내일은 오늘의 숙성한 얼굴을 만지며 황혼의 이불을 펴고 있다 화첩을 열면 책장 속으로 ...

09/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