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윤동주 /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19/0105  
윤동주 /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13/0108  
윤동주 / 

눈이 새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해요.

13/0108  
윤동주 /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어요.

13/0108  
윤동주 / 한난계 (寒暖計)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 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零下)로 ...

11/1109  
윤동주 / 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11/0702  
윤동주 / 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11/0112  
윤동주 / 편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

11/0111  
윤동주 / 팔복八福 - 마태복음 5 장 3 ~ 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1/0111  
윤동주 /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1/0111  
윤동주 / 산상 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 처럼 기는 산 우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는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

10/1207  
윤동주 /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 갑북

10/1010  
윤동주 / 가슴

불 꺼진 화덕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灾)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09/0304  
윤동주 /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09/0206  
윤동주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를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

09/0109  
윤동주 /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

08/0707  
윤동주 /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08/0627  
윤동주 /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

08/0623  
윤동주 / 아무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든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

08/0611  
윤동주 /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0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