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유 하 / 인생공부

체중계의 바늘이 0을 가리키는 내 몸무게에 깜짝 놀라 당장 시작한 벤치 프레스 하나 하나 늘려가는 바벨의 중량 덕분에 풍선 바람 나가듯 빠지는 살도 살이지만 신기하여라 그 무심한 쇳덩어리들이 손 시린 인생공부를 시킨다 새로운 무거움을 접하며 비로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전 단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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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하 / 그 빈자리

미류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도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한마리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류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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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하 / 아브라카다브라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 아브라카다브라 눈먼 자의 손을 갖게 해주오 내 두 눈을 바치리니 아브라카다브라 눈먼 자의 손에 깃든 감각과 심장을 내게 주오 그 사람의 따뜻한 빰을 만지며 우주의 두근거림을 느끼리니 아브라카다브라 귀먼...

09/1205  
유 하 / 나무의 지혜

대나무숲이 있다 대숲이 거센 폭풍을 잠재울 동안 사람들은 아늑한 꿈의 대숲 속으로 깃들일 수 있었다 사람의 지혜가 그 숲을 만든 것이다 대나무숲이 있다 바람 불면 그 무수한 구부러짐의 장관이 삶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무의 지혜가 아름다움을 만든 것이다 대숲 가의 사람들은 끝없...

09/1205  
유 하 / 말들의 풍경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 빗방울, 툭 나무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숲의 노래를 듣는다 바람이 숲의 울대를 간질이며 지나는 순간 나뭇잎이 후드득 소리를 낸다 나뭇잎이 소리를 내기 전까진 빗방울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몰랐다 숲이 온몸으로 운다 숲의 육체가 없었다면 나는 바람...

09/1205  
유 하 / 어떤 질주에 관한 명상한

여자 아이가 힘차게 달려간다 축구공을 차며 금방이라도 소녀, 쪽으로 기울어질 듯한 긴장감이 축구공을 팽팽하게 부풀리고 놀이터를, 수많은 꽃망울들을, 허공을, 등그렇게 부풀린다 그 아이의 가슴이 위험하다 힘차게 질주하는 모호성이 위험하다, 키들거리며 여자 아이가 달려간다 수컷됨의 ...

09/1205  
유 하 /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 뼈가 있는 연체 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

09/1205  
유 하 / 꽃이라 불렀는데, 똥이 될 때

이 곰은 성질이 사나워서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불곰이 갇힌 철창 으시시한 푯말 앞에서 저 곰 바보 같애 실없이 웃고 있는 구경꾼들 무엇이 성질이 불 같은 정글의 왕자를 실없는 바보로 만드는가 갇혀 있기에 길들여진 것은 엉덩이에 까맣게 똥이 눌러붙은 저 꽃사슴 떼처럼 추하다 ...

09/1205  
유 하 / 왕재산*, 눈 내리는 무덤 가에 앉아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들만 여기 모여 둥그런 무덤 같은 산을 이루었구나 솔가지를 껴안은 칡순들 저 혼자 깊어져 주검 근처로 혀뿌리를 뻗어내리고 산꿩 한 쌍 이승의 눈꽃 춤을 시리게 몰고 와 살아 있는 자의 몸 속으로 날개를 접는다 구시포의 바다를 통째로 싣고 날아온 바람의 달구지...

09/1119  
유 하 / 열두 개의 달

나 홀로 저녁의 강가를 걸었네 그녀와 이 길을 걷던 날들은 강물과 함께 흘러가고 나는 열두 개의 달을 생각했지 우리들 산책가의 태양이었던 그 달을 그녀와 내 두 눈에 담긴 네 개의 달 강물에 내려앉은 달 한 마리 살랑대는 은어의 눈동자를 비추던 달 그리고 저 솔숲 부엉이의 두 눈...

09/1119  
유 하 /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 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 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있다 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순간 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 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

09/1119  
유 하 /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

09/1119  
유 하 / 파고다 극장을 지나며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키는구나, 파고다 극장 한땐 영화의 시절을 누린 적도 있었지 내 사춘기 동시상영의 나날들 송성문씨 수업 도중 햇살을 등에 업고 빠져나온, 썬샤인 온 마이 쇼울더, 그날의 영화들은 아무리 따라지라도 왜 그리 슬프기만 하던지 동시상영의 세상 읽기가 나를 얼마나 조...

09/1119  
유 하 / 폭포

그대는 무진장한 물의 몸이면서 저렇듯 그대에 대한 목마름으로 몸부림을 치듯 나도 나를 끝없이 목말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시도 벼랑 끝에 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

09/1118  
유 하 / 레만호에서 울다

맑고 고요한 레만 호수여, 너는 얼마나 내 살아온 어지러운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가 - 바이런, \'맑고 고요한 레만 호수여\' 중에서 차를 몰고 가다 하룻밤 머무는 생수처럼 차분한 에비앙이란 마을, 물안개 자욱한 저녁 호반의 벤치에 앉아 레만 호를 바라본다 멀리 수정처럼 반짝이는 ...

09/1118  
유 하 / 느림

까치 한마리 나뭇가지를 물고 숲속으로 날아가네 한 마음의 뭉클함이여, 나 그대를 불러보네 새가 둥지를 짓기 위해 첫 나뭇가지를 얹어놓듯 그대라는 이름으로 불러보는 무수한 들꽃과 풀잎 그대 깃들이지 않은 곳 없네 저 휘파람새 울음 붉은 산수유 열매, 토끼풀꽃, 갈대의 흔들림 새들은 내...

09/1118  
유 하 / 아유정전(阿庾正傳), 또는 허송세월

전주의 한 여자 점쟁이가 내 관상을 보더니만 쯧쯧, 허송세월이야! 난 똥빛의 얼굴로 애써 억지 웃음을 지었다 허송세월……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말이 은근히 두고두고 마음을 긁었다. 글쎄 내 직업 자체가 베짱이, 허송세월 아닌가? 위안은 해보지만…… 빌려준 비디오테이프를 받으려고 ...

09/1118  
유 하 / 중독된 사랑

그 사람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한동안 깊은 마음의 병을 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사람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를 힘겹게 고백하려 하였으나, 막상 그토록 쓰린 아픔 이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굳은 약속을 파기한 그 순간, 내 가슴에 박혔...

09/1118  
유 하 / 삼킬 수 없는 노래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09/1118  
유 하 / 찌르르, 울었습니다

가을 늦은 밤이었습니다 노상의 곰 인형 까만 눈동자가 하도 뭉클하길래 한 번 꼬옥 안아보았습니다. 그 곰 인형의 무심한 몽뚱아릴 껴안는 순간 아기의 보드라운 살을 안듯 내 가슴 괜히 찌르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나를 안으려 하지 말아요 내 사랑 얼마나 더 무심해져...

09/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