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유안진 / 커피 칸타타

꿈도 없이 뉘우침도 없고 잠까지도 없는 하루의 끝에서 마지막  한 걸음 떼어놓다 말고 한번이라도 뒤돌아보게 될까 봐 한 잔을 마시고 눈 딱 감고 뛰어내리려고 또 한 잔을 마시고 거기 정말로 잠이 있나 확인하려고 한 잔을 더 마시고 잠 속으로 돌진할 마지막 준비로 머그잔 절반을 ...

17/0610  
유안진 / 시인의 유전자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구나\" 이브를 보는 순간 아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절창 한편이었다 너의 시인됨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겠느냐 고독해야만 사랑하게 되느니라 사랑해야만 시인이 되느니라.

16/1231  
유안진 / 계란을 생각하며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15/0308  
유안진 / 너무 늦어버렸다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더 용서하라(7x70)는 성경공부를 마친 신부가 끝마무리를 했다 용서할 사람이나 미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분은 없지요, 있으면 어디 손 들어 보세요?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돌아가시면 바로…… 신부의 말이 덜 끝나는데,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말...

12/1225  
유안진 / 마이너리티

무엇에나 이기면 좋고 지면 화나지 지고만 살아와서 마음은 늘 화나 있고 몸은 늘 병든걸 단물 신물 쓴물 짠물 다 마셔봤지 마셔봤다고 뭐가 달라져야 말이지 일상은 전쟁이고 일터는 전쟁터인걸 내상(內傷)으로 골병 든 부상병인걸 일상에서 도망 다니는 도망병, 결국은 붙잡히는걸 붙잡히지 않는 바...

12/1202  
유안진 / 밥해주러 간다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한 막내 눔 밥해주는 거 자슥 밥 먹이...

12/1117  
유안진 / 현재는 선물이 아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세상을 찾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화어(火魚)를 찾아 떠나기만 하는 나는 헤매기만 하는 나는 믿어지는 것만 믿는 나는 겨울밤 지하도의 노숙자를 지나가는 나는 현재(present)가 곧 선물(present)이라는 말을 혐오하며 믿고 싶은 것만 믿기로 한다 미래만 믿기로 한다 ...

12/1101  
유안진 / 아버지의 마음

휴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씀씀이가 하도 헤퍼 용돈 적게 줬더니 등록금을 쓰고 휴학해버렸다고 돈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식 아까워서 그랬다는데 맞다 하느님 아버지도 내가 아까워서 낡은 날 더 망치게 될까 봐 달라는 대로 즉각 다 주시진 않는 거다

12/0904  
유안진 / 은발이 흑발에게

어제는 나 그대와 같았으나 내일은 그대가 나와 같으리라. * 터키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전해지는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하는 말에서

12/0904  
유안진 / 자랑거리

아기 안은 엄마를 구경하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새끼를 안고 와 보여준다

12/0904  
유안진 / 손부터 보여 드려라

병상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던 소녀가 먼저 죽게 되었다 성사聖事 오신 신부에게 소녀가 고백했다 주일미사는 늘 빠졌고, 기도도 눈감자마자 잠들어버리곤 했습니다 신부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나무껍질 같고 막돌멩이 같았다 괜찮다 얘야, 하느님께는 네 손부터 보여 드리거라. * 고준석 신부의...

12/0904  
유안진 / 농담, 최소한 셋이라?!

병원에서 나오다가 친구와 마주쳤다 아프지 않는 누가 있다고 없는 병 만들어서 병원 수입 올려주느냐고 핀잔이다 때 없이 복통에 속쓰림에 두통에도 시달리는데 기계도 의사도 다 돌팔이라고 매도하자 마시던 커피를 흘리면서 묘한 미소로 바라본다 복통에 속쓰림에 두통까지 동시에? 콧소리 섞어 간지럽...

12/0715  
유안진 / 손대지 마라

부수고 깨트리고 쪼개지 마라 그저 한낱 돌멩이로 바위로만 보이느냐 하늘이 지으신 바 이대로가 부처니라 창조의 손바닥 그 체온에는 바람도 머뭇대고 구름도 묵묵히 읽고 가느니 햇빛이 달궈놓고 눈 서리가 식히는 불과 얼음의 길이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밤마다 달빛에 별빛에 씻어 말리는 몸이니라 ...

12/0607  
유안진 / 넌센스

1+1=과로사 2+2=덧니 덧니+덧니=드라큘라 처럼 처럼 처럼 정답은 정답이 아니니까 ?를 앞세우고 무모했던 한 때도 왜 없었겠냐만 초보적인 것에조차도 물음표가 없어졌다 사는 데는 초보면 충분하니까 물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정답은 없으니까 정답이 아니어야 정답이니까

12/0607  
유안진 / 96

66과 99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69는 99와 66을 거쳐 96에 이르기도 하지 무수한 뒤집힘과 곤두박질을 거치면서 사랑의 완성은 그렇다고 길 끝에서 새 길이 열린다고 지구는 둥그니까 서로 등 돌려 가다가 다시 69가 될 수도 있다고 너무 쉽게들 말하지 그 말밖엔 할 말이 없으니까 자기 일이 아...

12/0607  
유안진 / 들꽃 언덕에서

들꽃 언덕에서 깨달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깨달았다

12/0510  
유안진 / 박수 갈채를 보낸다

춘설은 차라리 폭설이었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덩이를 쏟아내며 제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째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 속에도 겨...

12/0202  
유안진 / 내 가슴을 말구유로

올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주님 지금 제 마음은 황량한 들녘 승냥이떼 울부짖는 야밤중 홀로 버려진 새끼 양 같습니다. 외마디 울음 섞어 간절히 부릅니다. 아기씨, 예수님 불빛 같은 이름이여 살의(殺意)와 거짓과 비웃음만이 기다리는 세상에 여리디여린 목숨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여 인생의 눈...

11/1226  
유안진 / 위대한 유산

저녁상을 물리고 지아비를 기다리며 아기와 함께 읽은 예수의 생애 네 눈이 보아 내는 참모습 그대로 네 귀가 들을 수 있는 옛음성 그대로 젖 먹는 네 입이 처음으로 부르는 위대한 이름 아가야 네게 줄 나의 재산은 오직 그의 이름뿐이지

11/1226  
유안진 / 청년 그리스도께

숱한 남성을 짝사랑한 후에 가을 수플 되어 버린 내 머리채 흙먼지 날리는 사막 같은 가슴 그 어디에서 그대는 발견되었는가. 내 미처 보아도 보지 못하던 눈 들어도 듣지 못하던 내 귀 그 누가 열어 주어 아아 한스러운 이 몰골 그대 어찌 이제사 내 앞에 뵈었는가 청년 그리스도 나의 사랑이...

1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