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오규원 / 밤과 별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더 어두워진 나무는 가지와 잎을 지워진 세계 위에 놓고 산은 하늘을 더 위로 민다 우듬지* 하나는 하늘까지 가서 찌그러지고 있는 달을 꿰고 올라가 몸을 버티고 있다 그래도 ...

19/0109  
오규원 / 하늘과 돌멩이

담쟁이 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 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앉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19/0109  
오규원 / 

- 김현에게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식의 웃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때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쭉쭉 빨며 장맛을 보고 이...

19/0105  
오규원 / 그 마을의 住所주소

(!) 그 마을의 주소는 햇빛 속이다 바람 뿐인 빈 들을 부둥켜안고 허우적거리다가 사지가 비틀린 햇빛의 통증이 길마다 늘려 있는 논밭 사이다 반쯤 타다가 남은 옷을 걸치고 나무들이 멍청히 서서 눈만 떴다 감았다 하는 언덕에서 뜨거운 이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소름끼치는, 소름끼치는 울음을 우...

17/0610  
오규원 /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12/1109  
오규원 /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

12/0705  
오규원 / 소년과 나무

한 소년이 나무를 끌어안고 앞을 보고 있다 햇빛이 벽처럼 앞을 가리고 있다 앞이 파도치는지 나무가 파도치는지 두 팔로 나무를 가슴에 바짝 끌어안고 눈을 찡그리고 한 소년이 나무 뒤로 한쪽 귀를 따로 숨기고 있다 나무는 앞을 보지 않고 처음부터 위를 본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

12/0219  
오규원 / 나무와 허공

제발 내 시속에 와서 머리를 들이밀고 무엇인가를 찾지 마라. 내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것은 없다. 이우환 식으로 말해, 있는 그대로를 읽으라. 어떤 느낌을 주거나 사유케 하는 게 있다면 그곳의 존재가 참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현상이 참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

10/0512  
오규원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

10/0501  
오규원 / 부처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

09/0706  
오규원 / 그대와 산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09/0702  
오규원 / 

길에 그림자는 눕고 사내는 서 있다 앞으로 뻗은 길은 하늘로 들어가고 있다 사내는 그러나 길을 보지 않고 산을 보고 사내의 몸에는 허공이 달라붙어 있다 옷에 붙은 허공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되어 있다

09/0522  
오규원 / 프란츠 카프카

- MEM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

09/0425  
오규원 / 그림과 나 2

허공에 크고 붉은 해를 하나 그렸습니다 해 바로 아래 작은 산 하나를 매달아 그렸습니다 해와 산은 캔버스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산 귀퉁이에는 집을 하나 반쯤 숨겨 그렸습니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 창을 드르륵 엽니다 지나가던 새 한 마리가 집에 눌려 손톱만하게 된 나를 빤히 쳐다보다 ...

09/0315  
오규원 / 숲과 새

떡갈나무 하나가 떡갈나무로 서서 잎과 줄기를 잎의 자리와 줄기의 자리에 모두 올려놓았다 그 자리와 자리 사이로 올 때도 혼자이더니 갈 때도 혼자인 어치가 날다가 갈참나무가 되었다

09/0315  
오규원 / 나무와 나무들

뜰의 산벗나무 밑에서 뜰의 층층나무와 마가목 밑에 서 홍매화와 황매화 밑에서 고욤과 살구 밑에서 모과 밑에서 자귀나무 밑에서 때죽나무 밑에서 석죽과 돌단풍 밑에서 고려영산홍과 배롱나무 밑에서 조팝나무 밑에서 불두화와 화살나무 밑에서 그들이 산다 이 지상에서 가장 얇고 납작한 나무들

09/0315  
오규원 / 9월과 뜰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09/0315  
오규원 / 나무에게

물의 눈인 꽃과 물의 손인 잎사귀와 물의 영혼인 그림자와 나무여 너는 불의 꿈인 꽃과 이 지구의 춤인 바람과 오늘은 어디에서 만나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오느냐

09/0305  
오규원 /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하네 밤새 젖은 풀 사이에 서 있다가 몸이 축축해진 바람이 풀밭에서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있네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 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

09/0304  
오규원 / 지붕과 벽

어두워지자 골목의 구석에서는 가랑잎을 뒤적이던 바람이 가랑잎 밑에서 잠들었다 몇 개의 가등이 사라지는 길을 다시 불러내고 어둠은 가등을 둘러싸고 자신을 태워 불빛을 지켰다 달이 뜨자 지붕과 벽과 나무의 가지와 남은 잎들이 제 몸 속에 있던 달빛을 몸밖으로 내놓았다 달은 조금씩 다른 자기의 ...

09/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