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안도현 / 첫사랑

그 여름 내내 장마가 다 끝나도록 나는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있던 한 마리 무당벌레였습니다 비 그친 뒤에, 꼭 한 번 날아가보려고 바둥댔지만 그때는 뜰 안 가득 성큼 가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코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19/0703  
안도현 / 쉼표

크다가 말아 오종종한 콩나물 같기도 하고, 연못 위에 동동 혼자 노는 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 구멍가게 유리문에 튄 흙탕물 같기도 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언뜻 본 귀고리 같기도 하고, 동무 찾아 방향을 트는 올챙이 같기도 하고, 허리가 휘어 구부정한 할머니 같기도 하고,

19/0105  
안도현 / 겨울 아침

눈 위에 콕콕 찍어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 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 온 긴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번거렸다

17/0124  
안도현 / 극진한 꽃밭

봉숭아꽃은 마디마디 봉숭아의 귀걸이, 봉숭아 귓속으로 들어가는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알아들으려고 매달려있다가 달량달량 먼저 소리를 만들어서는 귓속 내실로 들여보내고 말 것 같은, 마치 내 귀에 여름 내내 달려 있는 당신의 말씀 같은, 귀걸이를 달고 봉숭아는 이 저녁 왜 화단에 ...

13/0126  
안도현 /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화암사 안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 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는 소리에 덕지덕지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

12/1110  
안도현 / 예천 태평추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

12/1012  
안도현 / 예천

있잖니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이 맑은 곳이 어덴지 아니껴? 바로 여기 예천잇시더. 물이 글쿠로 맑다는 거를 어예 아는지 아니껴? 저러쿠러 순한 예천 사람들 눈 좀 들여다보소. 사람도 짐승도 벌개이도 땅도 나무도 풀도 허공도 마카 맑은 까닭이 다 물이 맑아서 그렇니더. 어매가 나물 씻고 아부지...

12/1012  
안도현 /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

소나무의 정부(政府)가 어디 있을까? 소나무의 궁궐이 어디 있을까? 묻지 말고, 경상북고 울진군 서면 소광리로 가자 아침에 한 나무가 일어서서 하늘을 떠받치면 또 한 나무가 일어서고 그러면 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서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 여기에서 누가 누구를 통치하는가? ...

12/1012  
안도현 / 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

12/0601  
안도현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당신의 그늘을 표절하려고 나는 밤을 새웠다 저녁 하늘에 초생달이 낫을 걸어놓고 모가지를 내놓으라 하면 서쪽으로 모가지를 내밀었고, 달빛의 헛구역질을 받아먹으라고 하면 정하게 두 손으로 받아먹었다 오직 흔들리는 힘으로 살아가는 노란 꽃의 문장을 쓰다가 가늘게 서서 말라가도 좋다고 생각한...

11/1226  
안도현 / 전어속젓

날름날름 까불던 바다가 오목거울로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곰소만(灣)으로 가을이 왔다 전어떼가 왔다 전어는 누가 잘라 먹든 구워 먹든 상관하지 않고 몸을 다 내준 뒤에 쓰디쓴 눈송이만한 어둔 내장(內臟) 한 송이를 남겨놓으니 이것으로 담근 젓을 전어속젓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이여, 사랑에...

11/0928  
안도현 / 일기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

11/0825  
안도현 / 그리운 여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

11/0130  
안도현 /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

11/0116  
안도현 / 빈 논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습니다 저는 추운 서생(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11/0112  
안도현 /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려도 오지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

10/1122  
안도현 / 

제비떼가 날아 오면 봄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봄은 남쪽나라에서 온다고 철없이 노래 부르는 사람은 때가 되면 봄은 저절로 온다고 창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 들판에 나오너라 여기 사는 흙 묻은 손들을 보아라 영차 어기영차 끝끝내 놓치지 않고 움켜쥔 일하는 손들이 끌어당기는 봄을 ...

10/0901  
안도현 / 어둠이 되어

그대가 한밤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10/0901  
안도현 / 두더지

나는 다시금 두더지네 집으로 빚을 얻으러 가야겠다 그들의 곳간에는 지렁이의 명아줏대지팡이가 즐비하고 비가 오면 쥐며느리의 황금요강으로 빗물을 받아 발을 씻는다 한다 보기 싫은 것을 보기 않기 위해 그들은 땅속에서도 두 눈에 안대를 하고 다닌다 빛을 경배하는 교도들을 피해 굴 속으로 들었다...

10/0404  
안도현 / 배꼽 시계

(배) 배가 고프니? (꼬) 꼬르륵 꼬르륵 (ㅂ) 밥 먹어야 할 (시) 시간이라고? (계) 계산 하나는 잘하네

09/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