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신동엽 / 산문시 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아이덱거 럿셀 헤밍웨이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16/0204  
신동엽 / 여름 이야기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16/0204  
신동엽 / 여름 고개

산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16/0204  
신동엽 / 보리밭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뻐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

16/0204  
신동엽 /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그렇지요, 좁기 때문이에요. 높아만 지세요, 온 누리 보일거에요. 잡답(雜踏) 속 있으면 보이는 건 그것뿐이예요. 하늘 푸르러도 넌츨 뿌리 속 헤어나기란 두 눈 먼 개미처럼 어려운 일일 거에요. 보세요. 이마끼리 맞부딪다 죽어가는 거야요. 여름날 홍수 쓸려 죄없는 백성들은 발버둥쳐 갔어요....

16/0204  
신동엽 / 진이의 체온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 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

16/0204  
신동엽 / 기계機械야

아스란 말일세. 평화한 남의 무덤을 파면 어떡해. 전원으로 가게, 전원 모자라면 저 숱한 산맥 파 내리게나. 고요로운 바다 나비도 날으잖는 봄날 노오란 공동묘지에 소시랑 곤두세우고 정령기(占領旗) 디밀어 오면 고요로운 바다 나비도 날으잖은 꽃살 이부자리가 예의가 되겠는가 말일세. 아스란 ...

16/0204  
신동엽 / 꽃대가리 - 원추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투드리면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삼한(三韓) 적 ...

16/0204  
신동엽 / 눈 날리는 날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

16/0204  
신동엽 /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

16/0204  
신동엽 / 이곳은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태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치고 깃발은 돌아갔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

16/0204  
신동엽 /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

1 줄줄이 살뼈도 흘러나려 내를 이루고 원한은 물레밭을 이랑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짓는 하늘 속으로 진주(眞珠)배기 치마폭 화사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황토벌, 전쟁을 불지르고 간 원생림(原生林)에 한가닥 노래 길이 열려 한가한 마차처럼 대륙이 기어오고 있었다. ...

16/0204  
신동엽 /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허구헌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빠알간 가랑잎은 날리어 오고. 발부리 닳게 손자욱 부릍도록 등짐으로 넘나들던 저기 저 하늘가. 울고는 아니 허리끈은 졸라도 뒤밀럭, 뒤밀럭 목메인 자갈길에.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그 언젠가 먼산바리 소녀 떡목판 이고 ...

16/0204  
신동엽 /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 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秋夕)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뻐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

16/0204  
신동엽 / 정본 문화사대계

오랜 빙하기(氷河期)의 얼음장을 둟고 연연히 목숨 이어 그 거룩한 씨를 몸지녀 오느라고 뱀은 도사리는 긴 짐승 냉혈(冷血)이 좋아져야 했던 것이다. 몇 만년 날이 풀리고, 흙을 구경한 파충(爬蟲)들은 구석진 한지에서 풀려나온 털 가진 짐승들을 발견하고 쪽쪽이역량을 다 하여 취식...

16/0204  
신동엽 / 풍경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異國)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山麓) 토막(土幕)가 서성거리는 초병(哨兵)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

16/0204  
신동엽 /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

도시의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 봄 1960년대의 의지(意志)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人跡) 없는 토막(土幕) 강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大地)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貪慾)과 횡포 비둘기는 동해(東海) 높이 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丘陵) 이룬 처...

16/0204  
신동엽 / 향아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傳說)같은 풍속으로 ...

16/0204  
신동엽 / 4월은 갈아엎는 달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 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사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

16/0204  
신동엽 / 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 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라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

1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