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신경림 / 장미와 더불어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들이 물오른 덩굴을 타고 쏜살같이 하늘로 달려 올라간다 다람쥐처럼 까맣게 올라가 문득 발 밑을 내려다보고는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 뜨면 아 저 황홀한 땅 위의 아름다움 너희들 더 올라가지 않고 대롱대롱 가지 끝에 매달려 꽃이 된들 누가 탓하랴 땅...

19/0109  
신경림 / 히말라야의 순이

하얀 설산이 바로 동네 뒷산이다. 해발 이천오백 미터능선 위의 시노아 마을. 종일 산길을 걸어 도착하니 소낙비가 멎었다. 서슬을 세운 건너편 산비탈을 감은 구름이 걷히고 거기 곡예하듯 붙은 집들에 별 같은 등불이 켜진다. 둥둥 두두둥, 막 저녁을 먹고 났는데 뜬금없는 북소리다. 로지 안마당에서...

19/0105  
신경림 / 묵뫼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

16/0101  
신경림 /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

15/0926  
신경림 / 너무 오래된 교실

윤민구: 50년 가을 아버지를 따라 월북,그 뒤 소식 없음. 유호영: 50년 여름 인민 의용군에 지원입대,북쪽 어딘가에 살아 있으면서 남쪽의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 김만근: 51년 입대,그해 동부전선에서 전사. 신만석: 52년 입대, 팔 하나를 잃고 돌아와 주정과 행패로 세월을 보내다가 읍내에서 ...

12/0625  
신경림 /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어지러운 눈보라 속을 비틀대며 달려온 것 같다 긴긴 진창길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한 한 해였던가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일년 내내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높은 데서 벌어지는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발길질에 드러나는 그들 무능과 부패에 더러...

11/1012  
신경림 / 늙은 소나무 - 밀양에서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11/0130  
신경림 / 쓰러진 자의 꿈 - 빛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10/0901  
신경림 / 홍수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집는 들어보아라, ...

09/0906  
신경림 / 장마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종돈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끗발나던 금광시절 요릿집 애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

09/0906  
신경림 / 바람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니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

09/0811  
신경림 /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 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은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짝도 ...

09/0516  
신경림 / 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 메데진*에서

경사가 급한 산비알에 움막집들은 빈 굴 껍데기처럼 달라붙어 있다. 지붕을 스칠 듯 케이블카는 위태롭게 기어오른다. 가끔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추어서는 승객들을 토해내기도 하고 또 주워 담기도 하면서. 한 삼십 년 전쯤 우리 산동네에서 만났던 아저씨들처럼 모두들 눈이 퀭하고 얼굴이 꺼...

09/0501  
신경림 / 그리운 나의 신발들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

09/0214  
신경림 / 새벽 이슬에 떠는 그 꽃들

오래 전에 잊혀진 고도 허물어진 성문 아래 좌판을 차리리 금잔화와 맨드라미와 과꽃 씨앗 몇 봉지 놓고. 진종일 기다리면 먼데 사는 두메 늙은이 하나 찾지 않으랴. 풍습도 말도 늙은이의 손에 들린 꽃씨를 좇아 나도 가야지 낡은 내 몸에서 시원스레 빠져나와서. 절뚝이는 늙은이의 그...

09/0206  
신경림 / 오랑캐꽃

간밤엔 언덕 위 빈집 문 여닫는 소리 들리고 밤새도록 해수 앓는 소리 들리고 철거더철거덕 돗자리 짜는 소리 들리더란다 십년 전 농사 버리고 떠난 영감 왔나부다 그래서 날 새면 올라가 보리라고 동갑네들 동트기만 기다렸더니 닭이 울기도 전에 부고 전화부터 왔다 다리 저는 그 영감 간밤...

09/0131  
신경림 / 새벽 안개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

09/0109  
신경림 / 

내 몸은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다 나는 날마다 벽을 박차고 힘껏 내달려보지만 득의양양 치켜든 내 눈앞을 매번 드높은 창살이 막아선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08/1218  
신경림 / 진눈깨비 속을 가다

불빛 환한 방안에는 커피 향내 짙겠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요정처럼 춤추겠지 진눈깨비 치는 어두운 밤길을 다리 절면서 사람들은 가고 젊은 부부 연속극 앞에 넋잃고 앉아 있을 거야 달콤한 대사에 눈시울들이 붉었을 거야 옷속으로 파고드는 매운 칼바람 여미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

08/1206  
신경림 / 말과 별 - 소백산에서

나는 어려서 우리들이 하는 말이 별이 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들판에서 교실에서 장터거리에서 벌떼처럼 잉잉대는 우리들의 말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꿈을. 머리 위로 쏟아져내릴 것 같은 찬란한 별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릴 때의 그 꿈이 얼마나 허황했던가고. 아무렇게나 배앝는 ...

08/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