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손택수 / 지게體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지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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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

20/0730  
손택수 /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레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

20/0730  
손택수 /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

20/0730  
손택수 / 대숲, 되새떼

대숲 위에 되새떼가 와서 운다 너도 뼈가 비었니 나도 비었단다 대나무들, 더는 뻗어 올라갈 수 없는 마디 끝에 새들의 뼈가 이어진다 마디마디 이어진다 대마디 몇을 더 뽑아올린 새, 울음이 댓잎처럼 돋아난다

20/0730  
손택수 /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배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 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리는 ...

20/0730  
손택수 /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 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로 드리우고 그물을 끄집어 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20/0730  
손택수 / 폭포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 얼얼하도록 매를 맞...

20/0730  
손택수 / 진흙길

길이 착 달라붙는 느낌, 뭐랄까 내 발이 무슨 나무뿌리라도 되는 줄 아나 나를 땅속에 아주 심어두겠다는 심사로 길 깊숙이 발을 끌어당겼다가 빼려고 하면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진절머리 말 마라 그런 여자가 나는 차라리 그리운가 보다 바지가랑이 좀 젖는다면 어떠냐 누가 나같은 것을 이렇...

20/0730  
손택수 / 지독한 나무

가만 보니 나무도 독한 데가 있다. 무슨 자해공갈범처럼 가을 들면서 나무는 제 몸에 상처를 낸다.  매달린 나뭇잎을 떨어트리기 위해  쓱싹쓱싹 톱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이 생활이었다고,  생활을 잃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nbs...

20/0730  
손택수 / 부엉이 바위

부엉이가 울었다는 산 부엉이 울음이 바위귀 속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었다는 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침을 놓듯 막힌 혈을 뚫어주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눈 이제 부엉이는 보이지 않는데 부엉이 울음이 다시 들린다 아직 어둠이 다 새지 않았다고 이 어둠을 뭉쳐 한 종지 이슬을 만들어야...

20/0730  
손택수 / 살가죽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컬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들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컬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리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걸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

20/0730  
손택수 / 선운 동백

동백을 까는 건 볕에게 맡겨라 난봉꾼처럼 꽃망울  슬슬  얼러대는 바람에게나 맡겨라 소싯적 나, 동백을 까본 적이 있다 꽃 소식 기다리다 지쳐 쳐들어간 선운사 동구 이러다 어느 세월에 꽃을 다 물들일까, 분단장 하고 손님들 맞을까 감질이 나서 더는 참지 못하고 ...

20/0730  
손택수 /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

20/0730  
손택수 / 술래의 노래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마당 구석구석을 쑤시고 있었다 혼자라는 게 영 마땅치 않았지만 술래가 된 게 마냥 싫지만도 않아서, 평소에 거들떠도 보도 않던 장롱 속과 정지와 헛간을 찬찬히 뜯어보는 재미로 해가 지는 줄 몰랐다 마당귀에 핀 봉숭아와 꽃속에 파묻힌 개미들, 구름 속에 숨은 낮달까지 꼭꼭...

20/0730  
손택수 / 꽃들이 우리를 체포하던 날

쌍용차 희생자 스물네 분의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 식목일 새벽에 중구청이 분향소를 철거하더니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다 사연도 모르고 마냥 해사하게 피어난 꽃들이라니 하긴, 방학 동안 철거용역 알바를 하고 학비를 마련하는 대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해도 취직은 되질 않고 대출 ...

20/0730  
손택수 / 바다 무덤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멎었다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 아기를 위해 아내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아마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나는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막막하게 ...

20/0730  
손택수 / 빗방울화석

처마 끝에 비를 걸어놓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놓고, 몇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쫒아다니던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듣는 일 가난한 골목길을 따라 퉁퉁 ...

20/0730  
손택수 / 꽃벼랑

벼랑을 쥐고 꽃이 피네 실은 벼랑이 품을 내어준 거라네 저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구겨진 옷 주름을 몇 번 더 구기면서,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출근버스 창밖 찡그리면서도 꽃은 ...

20/0730  
손택수 / 시집의 쓸모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 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

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