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곽재구 / 항구 - 용악에게

연안 통발 어선들 다닥다닥 붙은 선창 길 눈이 나려 배들의 얼굴이 하얗다 눈송이 참 곱누나 뱃사람들 떠들썩하게 웃으며 다찌노미집 연탄 화덕 곁으로 모이고 술청 아낙은 다시마 초고추장에 청어 과메기를 굽는다 사이다 컵에 소주 한 잔 마시고 적산가옥 늘어선 선창 골목길 걷다 낡은 도장가게 하나...

20/0729  
곽재구 / 강물

물을 보면 좋아요 흐르니까요 구름 바람 꽃향기 밤하늘 반짝이는 윤동주의 시 흐르는 것은 착해요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네요 나는 어디쯤에서 흐르다 멈추었을까요 물을 보면 좋아요 종일 노래 불러요 어제는 배가 고파 노래 부르지 못했어요 배고픈 날 부르는 노래가 진짜 노래라고 당신이 얘기...

19/1109  
곽재구 / 변산 꽃바람

- 소월에게 꽃향기 바람 부는 쪽으로 날아가고 마음은 바람이 잠든 곳으로 날아가네 꿈길 멀어 삼천리 개여울가 쭈그려앉은 동무여 찬물 위에 손가락으로 쓴 시 먼 서해에서 받아볼 수 없어라 지난밤 꿈에 짚신 열 컬레 메고 그대 머눈 약산 물 찾아갔네

19/0930  
곽재구 / 시인의 산문

우루무치의 박물관에서 두 남녀가 나란히 누운 미이라를 보았다 삼천년의 세월을 지척에 두고 마른 두 손을 쥔 연인 정경이 감동적이었다. 한때는 시가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 햇살, 들판, 시장, 창녀, 무지개..., 모든 것들이 무작정 가슴을 들뜨게 했다. 세상은 ...

19/0109  
곽재구 / 문복근씨의 공기 통조림

내 친구 문복근씨와 대인동 대한극장에서 최인호 원작의 방화 \"깊고 푸른 밤\"을 보았지 그때가 1985년이었던가 낯익은 골목의 어둠조차 불안하고 섬뜩하던 그 시절 학원안정법을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문복근씨는 주인공 안성기가 미 연방 이민관리국 직원 앞에서 성조기여 영원...

19/0109  
곽재구 / 풍경 2

한 늙은 시인이자 목수가 아니 한 늙은 목사이자 소설가가 철조망을 걷어내고 철조망 아래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갔다. 스무 살 적 내가 다닌 시골 대학의 인도 철학 교수는 연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진흙 속에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새로 핀 연잎들을 바라보며 이...

19/0109  
곽재구 / 풍경 1

배추꽃이 노오랗게 핀 황토밭을 바라보면 아름답다. 김병연이란 왕조 시대의 시인은 이곳 무등산 기슭에서 삿갓을 베고 눈 속에 묻혀 죽었다. 그것은 관념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본 일이 없는데 우리들은 그 자리에 삿갓을 씌운 돌비를 세웠다. 그날 밤 젊은 수배 학생 하나가 이 황토밭을 쫓기다가 ...

19/0109  
곽재구 / 종점

학교를 졸업한 지 십오 년 만에 우리들은 처음 모였다 다다미방에 덧니가 드러난 게이샤의 사진이 걸린 정종집은 진눈깨비 속에서도 북적대고 술 한잔을 서로 돌리며 우리들은 잃어버린 우리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증권회사 차장이 된 영철이는 하룻밤 50만 원이라는 여자 탤런트 이야기를 하고...

19/0109  
곽재구 / 눈 오는 밤

사랑을 위해 절망의 뼈를 깎는 사람들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고통을 위해 죽음 근처에서 어둠의 독배를 홀로 들이키는 사람들의 춤은 뜨겁습니다 당신에 대한 긴 기다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동안 우리들은 세상 도처에서 버려진 자의 쓸쓸한 잔을 들었습니다 몰매 맞은 이웃을 외면하고 무릎꺾인 선구자의 ...

19/0109  
곽재구 / 통일의 꽃

연변 삼꽃거리 두만강 식당에는 아름다운 달력 하나 붙어 있지 정월에서 동지섣달 일년 낸내 원추리처럼 한 가시내 이쁘게 피어 있지 서글한 눈매 가냘픈 옷고름 조선족이라면 누구든 연인이고자 했지 스물한 살 빛나는 조선 가시내 허름한 운동화 한 켤레로 그리운 조국의 절반 끌어안았지 ...

19/0109  
곽재구 / 앵두꽃이 피면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첫 입맞춤을 주랴 햇살도 곱디고운 조선 청보리 햇살 거두어다 바람도 실하디 실한 남도 산머루 바람 거두어다 너의 속살 고운 치마폭에 널어놓고 돌산머리 애장처 아메리카나 소비에트나 팔푼 얼간패 좀 보라고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

19/0109  
곽재구 / 서울세노야

오 년 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상보러 새로 두시 밤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

19/0109  
곽재구 / 구두 한 켤레의 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

19/0105  
곽재구 / 다산초당茶山草堂 가는 길

1 친구, 장작불이 툭툭 구들을 때리는 해남 윤씨 외가의 한 사랑에서 조금은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네 창을 열면 거기 황건 두른 바다갈대의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감물 먹인 삼베 옷자락 펄럭이는 마을의 아침이 빛나고 지금은 폐선 한 조각 드나듦이 없는 선창의 들목에서 수만 ...

16/0413  
곽재구 / 스무살

길 가다 꽃 보고 꽃 보다 해 지고 내 나이 스무살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 뒹구는 들눈썹 하나에도 입맞춤하였다네

16/0102  
곽재구 / 진달래꽃

지고 또 지고 그래도 남은 슬픔이 다 지지 못한 그날에 당신이 처음 약속하셨듯이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산이거나 강이거나 죽음이거나 속삭임이거나 우리들의 부끄러움이 널린 땅이면 그 어디에고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타올랐습니다.

16/0102  
곽재구 /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

16/0102  
곽재구 / 겨울날

겨우내 우리들은산을 털어 토끼를 몰고 개울 얼음을 깨 잠든 피리를 잡아 소주추렴을 하였다 곱은 손으로 성솔까지를 꺽어들고 숯막의 낮은 추녀와 쌓인 눈이 맞닿을 때까지 고함을 지르며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뒹구는 개울까에서 발에 동상이 드는 줄도 모르고 산 너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

16/0102  
곽재구 / 들국화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6/0102  
곽재구 / 그 오월에

자운영 흐드러진 강둑길 걷고 있으면 어디서 보았을까 낯익은 차림의 사내 하나 강물 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염색한 낡은 군복 바지에 철 지난 겨울 파커를 입고 등에 맨 배낭 위에 보랏빛 자운영 몇 송이 꽃혀 바람에 하늘거린다 스물 서넛 되었을까 야윈 얼굴에 눈빛이 빛나는데 어...

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