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복효근 / 우산이 좁아서

왼쪽에 내가 오른쪽엔 네가 나란히 걸으며 비바람 내리치는 길을 좁은 우산 하나로 버티며 갈 때 그 길 끝에서 내 왼쪽 어깨보다 덜 젖은 네 어깨를 보며 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면 길이 좀 멀었어도 좋았을 걸 하면서 내 왼쪽 어깨가 더 젖었어도 좋았을 걸 하면서 젖지 않은 내 가슴 저 안쪽은 오히...

19/0703  
복효근 / 낙엽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 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19/0105  
복효근 / 전망 좋은 곳

동해라고 하면 검푸른 파도 넘실거리는 후포나 울진 속초 곁의 그 바다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섬진강이 구례구를 돌아 사성암 못 미쳐 제 오지랖에 몇 가구 사람의 집을 품고 있는 곳 그곳에도 동해*가 있다 그 마을 뒤로 임도가 나 있고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산 강 마을 들 하늘 ...

17/0209  
복효근 / 울음의 빛깔

봄에 온 철새들은 봄 한철 제 목청껏 운다 새에게 울음은 짝짓고 새끼 기르는 데 불가분 관련이 깊겠거니 그처럼 애간장을 녹이는 일이 어디 있으랴 비바람 숭숭한 둥지 하나 틀어놓고 사랑한다, 내 아이를 낳아줘, 여기는 내 처와 내 새끼들이 사는 곳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외치는 일 뜨겁거나 ...

13/0424  
복효근 / 호박오가리

여든일곱 그러니까 작년에 어머니가 삐져 말려주신 호박고지 비닐봉지에 넣어 매달아놨더니 벌레가 반 넘게 먹었다 벌레 똥 수북하고 나방이 벌써 분분하다 벌레가 남긴 그것을 물에 불려 조물조물 낱낱이 씻어 들깻물 받아 다진 마늘 넣고 짜글짜글 졸였다 꼬소름하고 들큰하고 보드라운 이것을 맛있게 ...

13/0424  
복효근 / 눈 연습장

지난여름 섬진강가에 사는 이원규 시인 집에 갔을 때 같이 와 계시던 문인수 시인이 내려다보이는 강가 모래벌판을 가리키며 저거 이원규 시 쓰는 연습장 했으면 좋겠다 하신 뒤로 이원규가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가끔 지나칠 때면 이원규도 문인수 선생도 모르게 나도 그 연습장 몇 번 써보긴 했던 ...

13/0424  
복효근 / 로또를 포기하다

똥을 쌌다 누렇게 빛을 내는 황금 똥 깨어보니 꿈이었다 들은 바는 있어 부정 탈까 발설하지 않고 맨 처음 떠오르는 숫자를 기억해두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려운 두 누나 집도 지어주고 자동차를 바꾸고 아내도 아니, 아내는 이쁜 두 딸을 낳아주었으니 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좀 더 생각...

13/0424  
복효근 / 따뜻한 외면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13/0203  
복효근 / 꽃잎 융단폭격

누가 철조망을 둘러치다가 벚나무를 휘감아 지나갔습니다 철조망 한 토막이 고목 깊숙이 묻혀 제 살인 듯 아물었습니다 수천수만의 꽃잎들이 일제히 지상을 향해 융단폭격을 시작합니다 꽃잎에 맞아 아프기는 처음입니다

12/1110  
복효근 / 스위치

손끝으로 눌러 죽이는 대신 탁자 밑에 줄줄이 기어가는 개미 떼를 향하여 진공청소기를 대고 스위치를 켰다 아우슈비치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스위치만 눌렀을 뿐이었을 것이다 가자지구를 향하여 미사일을 날린 그들고 그랬을 것이다 눈 질끈 감을 필요도 없이 더구나 아주 멀리서, 딜도의 스위치를...

11/0825  
복효근 / 잡목숲이 아름답다

잡목들이 모여 숲을 아름답게 한ㄷ 오색잡놈 모여 사는 사람의 숲에서 내가 한낱 잡목 한 줄기에 지나지 않음을 비로소 알았을 때 눈시울에 아픈 잡목숲이 아름답다

11/0428  
복효근 / 연꽃과 소나기 사이에서

아이들 손잡고 덕진연못 연꽃 구경 갔다가 연못을 가로지른 현수교에서 소나기를 만났지 냅다 뛰어 공원 화장실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데 아이들은 아직도 다리 위에서 연잎과 비와 연꽃 함께 놀고 있네 연잎에 빗방울 구르는 모습에 아이들 웃음과 꾀 벗은 연꽃 표정이 섞여 연못은 커...

11/0118  
복효근 / 재래식 무 저장법

세상에 버릴 것 하나도 없더라 어머니가 무잎 한 가닥까지 한 두름 시래기로 엮는 동안 나는 무 구덩이를 팠다 얕아선 안되느니 구덩이가 얕으면 어설픈 추위에도 무 속이 곯는다 너무 깊어도 싹이 나고 바람들어 속이 빈단다 알맞게 파기는 늘 쉽지 않아서 어머니 꾸지람으로 구덩이가 파이면 싹이 ...

10/1010  
복효근 / 일생은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기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은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도 뜰 것이다

10/0901  
복효근 / 위태로움을 위한 기도

깜깜한 저 허공 저 진창의 지상을 내려보며 하필 눈송이는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안도하고 싶었을까 그 위태로운 선택이 그를 눈꽃이라 부르게 했으리라 지상의 모든 꽃은 그래서 제 몸에서 가장 먼 곳에 저를 피운다 심지어는 없는 길을 내어 허공에 꽃을 피우는 덩굴도 있잖은가 하느님이...

09/0929  
복효근 / 춘향의 노래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

09/0929  
복효근 / 허물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매미의 허물 속 없는 매미가 나무 위에 우는 매미를 증명하듯 저 매미는 또 매미 다음에 올 그 무엇의 거푸집인 것이냐 매미의 저 울울鬱鬱한 노래가 또 무엇의 어머니라면 세상의 모든 죽음을 어머니라 불러야 옳다 허공에 젖을 물리는 저 푸른 무덤들

09/0919  
복효근 / 헌화가에 부쳐

아무렴 그렇지 헌화가는 노인네가 불러야지 대가리 새파란 놈이 남 여편네 예쁘기로서니 언감생심 마음에 담았다간 그게 불륜인게여, 의업(意業)인게여 보라 타는 진달래는 여인의 속살빛깔로 고운데 때마침 훈풍에 서른 에닐곱 여인네 살내음 스쳐보아라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봄은 돌아...

09/0903  
복효근 /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내 비유법이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

09/0830  
복효근 / 군불을 때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서 쓰다가 버린 파지를 불쏘시개로 쓴다 쓰다가 고치고 쓰다가 고치다가 원본에서 멀어져버린 시 한 편을 위해 사상아처럼 버려진 종이들 누추하고 불구인 것들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못한 시 한 편의 알리바이를 위해 소신해야 하는 내 시의 과거들 제 몸에 불 붙여 ...

09/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