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박경리 / 

밤이 깊은데 잠이 안 올 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방 수술 후 뜨개질을 접어 버렸고 옷 짓는 일도 이제는 눈이 어두워 재봉틀 덮개를 씌운 지가 오래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의복은 신선도를 잃게 되었는데 십 년, 십오 년 전에 지어 입은 옷들이라 하기는 의복 속에 들어갈...

20/0729  
박경리 / 일 잘하는 사내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 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 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

13/0424  
박경리 / 한恨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

12/0827  
박경리 / 기다림

이제는 누가 와야 한다 산은 무너져 가고 강은 막혀 썩고 있다 누가 와서 산을 제자리에 놔두고 강물도 걸너내고 터주어야 한다 물에는 물고기 살게 하고 하늘에 새들 날으게 하고 들판에 짐승 뛰놀게 하고 초목과 나비와 뭇 벌레 모두 어우러져 열매 맺게 하고 우리들 머리털이 빠지기 전에 우...

12/0827  
박경리 / 축복받은 사람들

찬란한 가을 길목 소소한 바람 불고 사랑은 시인이 한다 해 떨어지는 부둣가 낙엽 뒹구는 간이역 사랑은 나그네가 한다 영혼의 밝은 샘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충일한 곳 사랑은 가난한 사람이 한다 그 밖에는 그저 그런 생식 탐욕과 이기의 공범자 시 그 자체 축복받은 사람들의 ...

12/0711  
박경리 / 사마천司馬遷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낯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12/0711  
박경리 / 히말라야의 노새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12/0711  
박경리 / 연민

갈대 꺾어 지붕 얹고 새들과 함께 살고 싶어 수만 리 장천 작은 날개 하나로 날아온 철새들 보리 심고 밀 심어서 새들과 나누며 살고 싶어 수많은 준령 넘어 넘어 어미와 새끼가 날아 앉는 강가 밀렵꾼 손목 부러트리고 새들 지켜 주며 살고 싶어 전선에 앉아 한숨 돌리면서 물 한 모금 밀알 하나 ...

12/0711  
박경리 / 판데목의 갯벌

피리 부는 것 같은 샛바람 소리 들으며 바지락 파다가 저무는 서천 바라보던 판데목 갯벌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빈 도시락 달각거리는 책보 허리 메고 뛰던 방천길 세상은 진작부터 외롭고 쓸쓸하였다

12/0711  
박경리 / 샤머니즘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생명과 현상과 법칙이 절묘하여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예술가입니다 가장 외포로운 존재 사람은 당신 속에서 신을 생각합니다 힘의 원천 억조창생은 당신의 힘을 조금씩 얻어서 살았습니다 삶의 터전 죽음의 계곡 당신은 생과 사를...

12/0711  
박경리 / 아침

고추밭에 물 주고 배추밭에 물 주고 떨어진 살구 몇 알 치마폭에 주워 담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닭모이 주고 물 갈아 주고 개밥 주고 물 부어 주고 고양이들 밥 말아 주고 연못에 까 놓은 붕어새끼 한참 들여다본다 아차! 호박넝쿨 오이넝쿨 시들었던데 급히 호스 들고 달려간다 ...

12/0711  
박경리 /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게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

12/0711  
박경리 / 배추

대추나무 밤나무 잣나무 잎새들 다투어 떨어지고 하마 오늘 밤은 서리 내릴라 낙엽 쌓인 밭고랑 누비며 살며시 정답게 배추 보듬어 짚으로 묶어 준다 목말라 하면 물 뿌려 주고 푸른 벌레들 괴롭히면 돋보기 쓰고서 잡아 주고 떨어진 낙엽 털어 주고 폭폭 흙 파서 거름 묻어 주고 배...

12/0711  
박경리 /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끓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럼타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

12/0711  
박경리 / 민들레

돌팍 사이 시멘트로 꽉 꽉 메운 곳 바늘 구멍이라도 있었던가 돌 바닥에 엎드려서 노오랗게 핀 민들레꽃 씨앗 날리기 위해 험난한 노정(路程) 아아 너는 피었구나

12/0711  
박경리 / 문학

나는 겁장이다 성문을 결코 열지 않는다 나는 소심한 이기주의자다 때린 사람은 발 옹그려 자고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잔다는 속담을 믿어왔다 무기 없는 자 살아남기 직전 무력함의 위안이다 수천 번 수만 번 나를 부셔버리려 했으나 아직 그 짓을 못하고 있다 변명했지 책상가 원고...

12/0711  
박경리 / 바다울음

바다 우는 소리를 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울음이 아니요 샛바람 소리라 했지만 나는 지금도 바다울음으로 기억한다 수평선에 해 떨어지고 으실으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물을 치고 울부짖었다

12/0711  
박경리 / 체념

타일렀지 이곳은 자유의 천지 해야 할 일 충분하고 푸성귀 아쉽지 않았고 거닐 수 있는 울타리 안은 꽤 넓은 편이며 밤에는 소쩍새 우는 소리 타일렀지 이곳은 나의 자유 해방된 곳이라고

12/0711  
박경리 / 우리들의 시간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12/0711  
박경리 / 시간 2

밥을 먹고 나면 오히려 허기가 가슴으로 밀려온다 자아,이젠 뭘 하지? 일 매듭짓고 나면 난장판 같은 자리 이 허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무관세음보살! 밖에서는 이 지상 나무 모두가 미친 듯 바람에 시달리며 울부짓고 그 속을 뚫으며 가느다란 시간 지나가고 있다

1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