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문태준 / 묽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20/0729  
문태준 / 여행자의 노래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 걸음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 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

20/0729  
문태준 /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텐데 집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 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

19/1109  
문태준 / 초여름의 노래

오늘은 만물이 초여름 속에 있다 초여름의 미풍이 지나간다 햇살은 초여름을 나눠준다 나는 셔츠 차림으로 미풍을 따라간다 미풍은 수양버들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미풍은 풀밭의 염소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살구나무 아래엔 노랗고 신 초여름이 몇 알 떨어져 있고 작은 연못은 고요한 수면처럼...

19/0105  
문태준 / 겨울밤

그믐달은 우물물처럼 차오르고 잠든 아이는 꿈에서도 자라나네 세월은 가을꽃처럼 早白조백하고 기러기는 찬 북쪽으로 날아가네 찬비가 내 창에 겨처럼 우수수 지네 보아라, 너는 어찌해 얼굴이 그리 거칠거칠한가

17/0209  
문태준 / 두터운 스웨터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날에 걸쳐 짜내 봄까지 엄마는 ...

17/0208  
문태준 / 나무 다리 위에서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

16/0202  
문태준 / 호두나무와의 사랑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16/0202  
문태준 / 역전 이발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

16/0202  
문태준 / 앵두 나무와 붉은 벌레들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16/0202  
문태준 / 봄비 맞는 두릅나무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16/0202  
문태준 / 망나니가 건넨 말

초승달을 저만치 걸어두고 무덤에서 반 썩은 열 되 남짓 내 송장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이 밤에 잡아 채거든 오랜 습관으로 알 것 삼신밥을 올리는 점쟁이로 알 것 산 사람이 귀양간들 탱자나무 안 세월이야 봉창 뚫린 집에 한 사나흘 묵었다 가지 마음은 허허벌판에 쏟아지는 우레 같은 것 ...

16/0202  
문태준 / 백운白露

뒤늦게 애가 들어선 사십대 여자처럼 늙은네 발톱 같은 껍질을 가르고 붉은 석류가 터져나오고 있었는데, 바람도 으스름달도 모르게, 먼데서 온 마수걸이 손님처럼 이슬 하나까지 얹혀, 그래도 살아남은 꽃시절이 있었다

16/0202  
문태준 / 회고적인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

16/0202  
문태준 / 개복숭아 나무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

16/0202  
문태준 /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

16/0202  
문태준 / 논산 백반집

논산 백반집 여주인이 졸고 있었습니다 불룩한 배 위에 팔을 모은 채 고개를 천천히, 한없이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왼팔을 긁고 있었습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 이내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나븟나붓하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값을 쳐 술잔 옆에 놔두고 숨소리 쌔그대든 논산 ...

13/0503  
문태준 /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썪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엄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데

13/0203  
문태준 / 속사速寫

초저녁부터 흰 눈이 내려 쌓였다 아이가 그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토끼, 물고기, 별, 토끼 위에 심장, 물고기 앞에 거북이, 별 아래 고래가 들어간다 뛰고 헤엄치고 깨어져 빛나고 두근거리고 시간이 느려지고 눈을 씻는다 마지막으로 해를 그려 넣는다 해는 가만히 떠 있지 않고 이 하늘을 ...

13/0109  
문태준 / 불만 때다 왔다

앓는 병 나으라고 그 집 가서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 왔다 오고 온 병에 대해 물어 무엇하리 지금 감나무 밑에 감꽃 떨어지는 이유를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 돋으라고 한 계절을 꾸어다 불만 때다 왔다

12/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