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문정희 / 길 잃어 버리기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자리인가요 탑처럼 서서 듣는 저 종소리가 나의 시인가요 종소리 속의 쇠 울음, 짐승의 순간 애달픈 육체 기꺼이 길을 떠나 기꺼이 길을 잃어버린 대낮 시간이 탕약처럼 졸아든 고도高島의 한가운데 길이 물이고 물이 길인가요 길을 잃기도 쉽지 않아 미로와 수로 사이...

19/0703  
문정희 / 

나는 좀 돌 같은 인간이다 물결무늬 점점이 박힌 현무암쯤으로 뭉쳐진 돌이다 끝내는 부서져 바람이 되겠지만 좀체 씻겨지지 않는 뼈가 솟아 있다 이 뼈가 무엇일까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화두는 그것이다 떠돌이 별이었다가 폭풍을 굴리는 꽃이었다가 사랑의 빗금으로 일어서는 나의 뼈는 늘 탑이 되고 ...

19/0703  
문정희 / 구르는 돌멩이처럼*

목에 걸고 싶던 싱싱한 자유 광화문에서 시청 앞에서 목 터지게 부르던 자유가 어쩌다 흘러 들어간 뉴욕 빌리지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녔지 자유가 이렇게 쉬운 거야? 그냥 제멋대로 카페 블루노트에, 빌리지 뱅가드에 재즈 속에 기타줄 속에 슬픔처럼 기쁨처럼 흐르는 거야? 내 고향 조악한 선거 벽보에...

19/0109  
문정희 / 겨울 일기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19/0105  
문정희 / 묘비명

묘비명을 \"됐어!\"라고 정해 놓은 사람을 안다 그의 아내의 묘비명은 \"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이다 \"됐어!\" 씨와 \"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 씨의 결혼 생활은 그런대로 행복했을 것같다 가을날, 허공에서 묘비명들이 떨어진다 \"이곳은 영혼이 말을 갈아타는 ...

17/0209  
문정희 / 뒷모습

머리에 검은 칠을 해 달라며 남편이 송충이같이 꿈틀거리는 염색 솔을 쥐여 준다 계절이 내 앞에다 누런 갈대숲을 들이민다 슬픔은 최고의 진리*라 이윽고 여기에 도달했다 짐승들 뛰어노는 벼랑에서 살아남아 손바닥 한쪽을 살며시 땅에다 갖다 대기 위해 가을 잎도 바람에 몸을 맡긴 날 위대한 항...

15/0308  
문정희 / 통역

깃털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내 몸에서 감탄이 깨어난다 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다 물살을 슬쩍! 일으킨다 깃털과 별과 나 사이 통역이 필요없다 그 의미를 묻지 않아도 서로 다 알아들었으니까

13/0127  
문정희 / 모래의 시

시간은 어디에서건 혈통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교하게 모래를 만드는 솜씨가 모두 똑같다 아드리아 바다에 온 지 몇 달 지났지만 나는 모래 한 알 만들지 못했다 시간이 정교하게 수많은 모래를 만드는 동안 나의 시는 간신히 새의 뼈 몇 조각을 주워 모래 위에 뜻 없는 십자가를 세웠을 뿐이다 ...

13/0127  
문정희 / 폭설 도시

폭설이 도시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첫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되었다 반짝이는 시간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발 밑에서 새의 깃털 소리가 났다 하얀 손을 가진 이 통치자는 누구인가 그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린 적도 없지만 역사상 어떤 만장일치로 세운 정부보다 빠르게 눈부신 풍요를 ...

13/0126  
문정희 / 식물원 주인

시인을 꿈꾸다가 시 대신 땅에 나무를 심어 식물원 주인이 된 그가 말했네 상처 없는 시가 없듯이 지상에 상처 없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더라고 했네 살아서 바람 앞에 흔들리는 목숨에 상처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빛나는 증표 쓰라린 아픔으로 진물을 흘리지만 깊은 성찰을 던진다네 시건 나무건 ...

12/1207  
문정희 / 소금꽃

많은 바다를 건넜지만 눈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다 나는 모르겠다 왜 바다의 밑바닥은 늘 모래인지 왜 흐름이 전부인지 길은 파도로 넘치고 싱싱한 가변의 꽃들 철마다 피어나는지 바닷새들은 불안한 울음을 끼룩끼룩 토해내는지 만약 나의 시에게 대답을 하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도 시를 버렸을 것이다...

12/1101  
문정희 / 아직도 모르겠어?

어떤 물음에도 대답은 저 무덤! 그 하나야 종교보다 깊고 거대한 침묵 천년 사원보다 영원하고 쓸쓸한 발설 이것이 처음이자 끝이야 무(無)를 발명한 사람도 그랬어 잃어버릴 게 없다는 것! 지금 사랑할 일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시인은 사라져도 시는 계속 태어날 것이며 해는 여전히...

12/1101  
문정희 / 눈동자는 왜 둥근가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은 슬프고 오싹한 동물원이다 둥근 눈동자로 둥근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눈동자가 둥근 것은 둥글게 보라는 것이다 둥근 눈물을 흘리고 둥근 달처럼 사방에 스미라는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둥근 눈동자로 둥근 씨앗을 만나려 한다 가빠지는 숨소리로 굴러가려 한다 둥근 ...

12/1012  
문정희 / 어머니의 시

어머니의 위대함은 가엾음에 있다 이 시의 첫 줄을 써놓고 한 시절을 보내고 이제 이렇게 풀어 나간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천둥과 번개를 침묵으로 만들어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살았다 그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죽었다 이삿짐을 내리는 선반 사다리 대신 한 남자가 짐승처럼 등을...

12/0715  
문정희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룰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

12/0506  
문정희 / 시이소오

어둠이 내려오는 빈 공원에서 혼자 시이소오를 탄다 한쪽에는 내가 앉고 건너편에는 초저녁 서늘한 어둠이 앉는다 슬프고 무거운 힘으로 지그시 내려앉았다가 나는 다시 허공으로 치솟는다 순간에 나는 맨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어둠은 한 마리 짐승 같다 푸른 피 흐르는 상처를 안고 뒹구는...

12/0215  
문정희 / 신록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솔개처럼 푸드득 날고만 싶은 눈부신 신록, 예기치 못한 이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난 겨울 깊이 박힌 얼음 위태로운 그리움의 싹이 돋아 울고만 싶던 봄날도 지나 살아 있는 목숨에 이렇듯 푸른 노래가 실릴 줄이야 좁은 어깨를 맞대고 선 간판들 수수께끼...

12/0215  
문정희 /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을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

12/0215  
문정희 / 새옷 입고

새해에는 새옷 하나 지어 입을까보다 하늘에서 목욕 나온 선녀들처럼 헌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가쁜한 알몸 위에 새옷 하나 갈아입을까보다 내가 사는 숲속에는 가시가 많아 그 가시에 찢기워 상처 많은 옷 흔해빠진 고독 이제는 훌훌 벗어버리고 새해에는 새옷 입고 새로 사랑할까보다 ...

11/1012  
문정희 /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고 울고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의 혀가 사라진 자리 냉기가 오소소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

11/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