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문인수 / 빨래궁전

야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

17/0703  
문인수 / 명랑한 거리

아구찜 대구찜 알곤찜 황태찜 해물찜 등 찜 전문 집이다. 이 \'누나식당\' 주인 처녀는 키가 크다. 말만 한 건각에 어울리게시리 무슨 산악회 회원인데, 산 넘고 산 넘은 그 체력 덕분인지 껑충껑충, 보기에도 씩씩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까지 그저 서너번 이 집에서 밥 사 먹었을 뿐이니 뭐, 단...

17/0610  
문인수 / 달, 나의 부메랑

- 그믐에서 초승까지 너 어디 있나. 막막한 곳으로 힘껏 눈 흘겨 보내고 막장 같은…… 그 어둠의 심장을 날카롭게 찢으며 또다시 내다보는 실눈.

17/0530  
문인수 / 곁들

은행나무 밑둥치마다 낙엽이 몰렸다. 이 추위가 아니라면 어찌 너의 이름 알리. 반음씩, 더, 다가간다. 따신 곁이 참 많다.

15/1210  
문인수 / 구름

저러면 참 아프지 않게 늙어갈 수 있겠다. 딱딱하게 만져지는, 맺힌 데가 없는지 제 마음, 또 뭉게뭉게 뒤져보는 중이다.

15/1210  
문인수 / 뒷짐

국도에서 바닷가를 향해 갈라지는 길 입구에, 한 노인이 힘겹게 발걸음을 떼고 있다. 잔뜩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길이 오히려 노인의 배꼽 쪽으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느라 여러 굽이 시꺼멓게 꿈틀대며 애를 먹는다. 우리는 휑하니 차를 몰아 포구를 돌아보고 올망졸망한 섬 풍경 앞에 내려 히히거리...

15/0308  
문인수 / 저 빨간 곶

친정 곳 통영 유자도에 에구구 홀로 산다. 나는 이제 그만 떠나야 하고 엄마는 오늘도 무릎 짚고, 무릎 짚어 허리 버티는 독보다. 그렇게 끝끝내 삽작까지 걸어나온, 오랜 삽짝이다. 거기 못 박히려는 듯한번 곧게 몸 일으켰다, 곧 다시 꼬부라져 어서 가라고 가라고 배뜰 시간 다 됐다고 손 흔들고...

13/0503  
문인수 / 각광받다

석양에 환한 춤이다. 저, 산 넘는 억새들의 뒷모습…. 극존칭의 광배를 보라. 너머 어디 노인들의 아름다운 나라가 있겠다.

13/0503  
문인수 / 빈 집은 왜 무서운가

빈 집은 왜 무서운가. 시꺼먼 털을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송곳니나 뿔, 식칼을 겨눈 것도 아니고 피 흘리는 것도 아닌데 왜, 빈 집은 무서운가. 지붕 아래 꽉 차 출렁거리는 저 고요가 양수羊水가 아니어서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 그 사랑 간데없어서, 그 사랑 갑자기 돌아와 다시 왈칵! ...

13/0203  
문인수 / 거처

바람이 잔다. 아, 결국 기댈 데란 허공뿐이다

12/1101  
문인수 / 안개

기차의 긴 꼬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았다. 마음의 자욱한 준령, 이 그리움 통과하지 못하겠다. 쿵쾅거리는 몸만 제자리 뜨겁게 만져진다

12/1101  
문인수 / 독백

평일의 인기척 없는 산길은 골똘하다. 저녁노을 어느덧 심중으로 몰린다. 저 엄청 큰소리가 어디 내 독백이랴. 세상 모든 고개 숙인 자들이 한꺼번에, 붉게 한 번 울부짖고 싶구나. 내 탓이요, 꽉 다문 입 속이 또 깜깜하게 홀로 저문다

12/1012  
문인수 / 나무예수

찬비 부슬거리는 가을입니다. 언덕 위엔 다만 단풍나무 홀로 뜨겁습니다. 젖어 더욱 붉게 불붙습니다. 먼 잿빛 반경 내의 온갖 물상들이 이 도시 변두리 낡은 집들의 창이며 추운, 어두운 마음들이 언덕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 올라갑니다. 제 깊은 슬픔 널어 말립니다

12/1012  
문인수 / 나그네

저도 모른다. 나그네는 걷다가 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지 모르고 길에서 쉰다. 모르고 올려다보는 저 정처定處.

12/1012  
문인수 / 누구냐

누구냐, 너를 지어 보이겠다. 욕망을 말해봐라. 그 무게를 달아주겠다. 저 한 덩이 구름, 여러 모로 뭉게뭉게 날 잡아먹더니 뭉게뭉게 죄 풀려 사라진다.

12/0829  
문인수 / 오카리나

오카리나 슬픔을 부는 새, 슬픔이 사랑을 분다, 사랑이 먼 길을 분다, 먼 길이 허공을 분다, 허공이 절망을 분다, 절망이 새를 분다, 오, 날 부는 새, 오카리나

12/0829  
문인수 / 유품

필생의 이 낡은 신분증, 단풍낙엽이다. 아예 자서전이다. 결말 또한 아름답다.

12/0829  
문인수 / 

꽝꽝, 벽에 귀가 생겨 창이 밝다.

12/0829  
문인수 / 통화 중

그곳은 비 온다고? 이곳은 화창하다. 그대 슬픔 조금, 조금씩 마른다. 나는, 천천히 젖는다.

12/0829  
문인수 / 난타, 소나기

너의 양철지붕 창고를 본 적 있다. 텅 빈 양철지붕 창고를 기억한다. 어둠으로 꽉 찬 양철지붕 창고, 너는 죽어 거기 걸터앉아 속 시원히 두드리고, 나는 살아 돌아눕고 돌아눕는 밤, 등/허리가 시원하다.

1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