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마경덕 / 죽은 피리 살리기

저 쌍골죽 잎마른병을 버틴 병죽病竹이다 골이 파인 살이 단단하고 소리가 잘 여물었다 뚫린 구멍으로 선계仙界까지 불러들인다는데 숨을 밀어 넣고 지공을 막아도 맥이 뛰지 않는다 사람의 입김으로만 혈이 트인다는 이 어둠은 몇 겹일까 거슬러 오르면 만파식적의 뿌리에 닿을 영목靈木이라. 헛바람...

19/1109  
마경덕 / 도장

마마가 돌던 해 또래 중 혼자 살아남은 계집아이 곰보라는 놀림에 눈이 붓도록 울었다 엄마는 말했다 울지마라 곰보자국은 하나님이 널 살려주신 증거란다 내 몸에도 증거가 있다 벼랑에서 굴러 이마에 찍힌 2cm 흉터 앞머리로 가린 죽음이 스쳐간 아찔한 흔적 제왕절개로 아랫배에 달라붙은 지네발도 ...

17/0209  
마경덕 / 동전 몇 닢

머리맡 자리끼가 얼던 밤, 윗집 종란이 아부지가 죽었다. 밥상을 엎고 장독을 깨부수던 종란이 아부지, 호롱불 아래 설빔을 마무리하던 엄마가 혀를 찼다. \"하필 정월 초하루에 출상이라니…\" 바람에 문풍지가 울고 있었다. 까치소리 차고 맑은 날. 뒷집 홀아비 지게꾼 학출이 아부지가 관을 지고...

15/0308  
마경덕 / 꽃과 밥

뿌리 잘린 꽃들이 행복하다 대부분 꽃의 생각은 긍정적이다 양동이에 담긴 노랑은 철없는 色, 애송이 꽃집처녀도 봄바람처럼 가볍다 몸값을 깎는다고, 꽃들이 입을 놀리기 전 먼저 지갑을 연다 제철이 아닌 장미에게 나는 호의적이다 하루치 식단과 한 다발의 꽃 반찬과 꽃을 달아보는 저울의 눈금은 ...

13/0424  
마경덕 / 뒤끝

버스 뒷좌석에 앉았더니 내내 덜컹거렸다 버스는 뒷자리에 속마음을 숨겨두었다 그가 속내를 꺼냈을 때도 나는 덜컹거렸다 뒤와 끝은 같은 말이었다 천변川邊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변심變心을 보고 있었다 이별을 작심한 그날부터 꽃은 늙어   북쪽 하늘이 덜컹거렸다   코푼 휴...

12/1219  
마경덕 / 글러브 중독자

최동원 선동열을 벽에 걸었다 무쇠팔, 무등산 폭격기를 바라보며 커브와 슬라이더에 집중했다 그는 속도 개발자 한쪽 발을 들고 속도를 섬겼지만 각도는 직설적이었다 변화구에 밀려 방어율이 낮은 청춘은 갔다 데드볼에 도루 같은 생이었다 글러브를 싣고 달려온 남자 지난봄 타율이 높은 길목에 터를 ...

12/1209  
마경덕 / 양배추

한 잎으로는 나를 주장할 수 없었어요 여러 겹이 되기 위해 하얗고 캄캄한 세상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합류하지 못한 몇 장의 바깥은 밭고랑에 버려진다고 했어요 앞과 뒤가 하나로 뭉쳐 온전한 이름을 얻었어요 누군가 굴러갈 수 있을 때까지 참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는 제가 골몰한 일...

12/1012  
마경덕 / 자전거보관소

인덕원역 자전거보관소, 환삼덩굴이 자전거의 목을 타고 오른다. 핸들에 빨간 장갑 한 켤레가 걸렸다. 저 장갑은 주인의 마지막 흔적, 마지막 정표이다. 낡은 자전거는 주인의 벗어둔 체취를 찾아 킁킁거린다. 쇠줄에 묶인 개처럼 한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린 시간, 시간을 넘긴 그리움에 두 개의 바퀴...

12/0909  
마경덕 / 오래된 가구

짧은 다리로 버티고 선 장롱 두 장정(壯丁)의 힘에 밀려 끙, 간신히 한 발을 떼어놓는다 움푹 패인 발자국 네 개 한 자리를 지켜온 이십 년의 체중이 비닐장판에 찍혀 있다 잠시 땀을 식히며 들여다본 허름한 목판(木版) 긁히고 멍든 자국이 드러난다 나무의 속살에 이렇듯 상처가 많았던가 언제부...

12/0909  
마경덕 / 집들의 감정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쉐르빌, 아크로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

12/0909  
마경덕 / 나무말뚝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다니, 한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불운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

12/0909  
마경덕 / 캔, 또는 can

뽀빠이! 올리브가 외치면 통조림이 달려왔다. 시금치 통조림이 올리브를 구했다. 미국은 뽀빠이를 내세워 시금치를 팔았다. 단숨에 한국까지 달려온 뽀빠이는 라면땅*을 팔고 롯데는 ‘자야’로 맞불을 놓았지만 삼양 뽀빠이를 당해내지 못했다. 덩달아 뽀빠이 이상용도 인기가 치솟았다. 그가 마이크를 ...

12/0715  
마경덕 / 그때 거들을 입었어

외로울 때면 거들을 입었어. 낯선 그 사내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웠어. 허술한 아랫배를 꽉 조이고 그 남자를 만나러 나갔지. 여의도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준, 그 변태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내 다리가 예쁘다고 말했어. 팔랑거리는 치마 속, 거들은 나의 힘, 거들이 없는 데이트는 정말 끔찍해....

12/0715  
마경덕 / 

1호선 전철, 휠체어를 탄 걸인이 껌을 내민다. 손때에 까맣게 절었다. 늙은 사내의 두 손에 공손히 앉아있는 귀퉁이 닳은 껌, 얼마나 퇴짜를 맞았나. 공손한 껌 속엔 싸늘한 눈초리가 들어있다. 수많은 졸음과 짜증이 묻어있다. 역과 역을 바꿔 타고 무릎과 무릎을 건너는 동안 껌은 단단하고 질...

12/0206  
마경덕 / 연장통

장례를 치르고 둘러앉았다. 아버지의 유품을 앞에 놓고 하품을 했다. 사나흘 뜬눈으로 보낸 독한 슬픔도 졸음을 이기진 못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상자는 관처럼 무거웠다. 어서 짐을 챙겨 떠나고 싶었다. 차표를 끊어둔 막내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 봤다. 이걸 어쩌당가, 마누라는 빌려줘도 ...

12/0206  
마경덕 / 비파나무 그늘

일제히 소인을 찍고 있는 나무들, 봄부터 쓴 장문의 편지들이 쏟아진다 허공에 쓰는 저 간절한 필체들 해마다 발송되는 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켜켜이 쌓인 주소불명, 수취거절, 수취인부재 미처 소인도 찍지 못한, 저 미납의 사연들 비파를 타던 그 사내 단물이 흐르는 목소리를 내 일기...

12/0206  
마경덕 / 

문을 열고 성큼 바다가 들어 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끓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12/0206  
마경덕 / 시골집 마루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

12/0206  
마경덕 / 옥상

도시의 옥상은 매력적이다 평수에 없는 땅을 배로 늘려 덤으로 준다 14평에 살아도 사실은 28평인 셈 하늘에 등기를 마친 건물의 꼭대기는 별도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많은 옥상을 거느린 하늘은 비와 햇빛과 바람으로 옥상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집들의 정수리에서 상추와 고추가 ...

12/0206  
마경덕 / 구름의 취향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 까마득한 하늘로 유학을 떠난 것은 모두 되돌아오기 위함이었다 도시에 거주한 구름들은 호기심이 많은 십대나 이십대 놀이공원 지붕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고 있다면 사춘기가 분명하다 이때부터 인증샷 셀카를 찍고 강과 바다...

1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