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도종환 / 동행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아픔일 때 그 위로 찬바람 불어 거리를 쓸고 갈 때 혼자 버리기엔 통증의 칼날이 너무 깊을 때 그 위로 저녁이 오고 어두워질 때 혼자 견디기엔 슬픔의 여진이 너무 클 때 그 세월 너무 길어 가늠하기 어려울 때 큰 눈물이 작은 눈물을 잠시 안아준다면 별 하나가 ...

20/0729  
도종환 /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

19/0703  
도종환 / 눈물

눈 물 마음 둘 데 없어 바라보는 하늘엔 떨어질 듯 깜빡이는 눈물같은 별이 몇 개 자다깨어 보채는 엄마없는 우리 아가 울다 잠든 속눈썹에 젖어있는 별이 몇 개

19/0307  
도종환 / 겨울 저녁

찬술 한잔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은 좋다 그러나 눈 내리는 저녁에는 차를 끓이는 것도 좋다 뜨거움이 왜 따뜻함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며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겨울 저녁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 쓰던 붓과 화선지도 밀어놓고 쌓인 눈 위에 찍힌 산짐승 발자국 위로 다시 내리는 눈발...

17/0212  
도종환 / 겨울 휴가

그날은 마침 대학 친구들과 중국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시집간 조카가 어려운 콘도 이용권이 당첨되었다고 홀로 있는 제 아버지 생일날이기도 하니 두 집이 함께 휴가 가자고 제안을 해 와서 난생 처음 스키장을 가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가족들과 함께 가는 게 그동안의 미안함을 더는 일이...

17/0124  
도종환 / 희망의 바깥은 없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로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 살이 ...

16/0413  
도종환 / 애너벨 리

퍽이나 오래된 이야깁니다. 바닷가의 한 왕국에 혹여나 여러분도 아실지 모를 애너벨 리라는 한 아가씨가 살았답니다. 날 사랑하고 내 사랑받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아가씨. 바닷가의 이 왕국에 그 애도 어린 아이 나도 어린애 하지만 우리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지요...

15/1229  
도종환 / 가을 오후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 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 물에 던지며 서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 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

15/0926  
도종환 / 듀엣

내가 그대 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대가 내 목소릴 포근히 감싸안으며 둘째 소절을 받아 부르고 내가 그대 입술을 바라보며 그대가 함께 있는 시간의 끝까지 그댈 사랑하겠노란 노랫말을 샘물처럼 흘려보내면 사랑이라는 말부터 그대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따뜻하게 젖어 ...

15/0926  
도종환 / 늦은 십일월

나무 끝에 매달린 버즘나무 잎 몇 개가 콜록콜록거리며 몸을 흔든다 십일월이면 나도 어김없이 감기에 걸리곤 한다 이십 분 일찍 강의를 끝냈다 열정이니 좌절이니 하는 말도 조금 일찍 접었다 둘째 시간이 되자 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몇은 끄덕이다 깜빡깜빡 졸고 한둘은 고개를 파묻었다 다음 학기부...

13/0424  
도종환 / 내 안의 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빚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 ...

12/0712  
도종환 / 따뜻한 찻잔

맨 살에 손을 댔는데 참 따뜻하다 한 손으로 아래를 받치고 한 손을 둥글게 감싸 살에 대는 순간 손바닥 전체를 가득하게 밀고 들어오는 온기 오래오래 사랑스러운 사람은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다 아침부터 희끗희끗 눈발 치는데 두 손 감싸 뿌듯하게 살을 만지고 있다가 공손히 입술을 ...

12/0215  
도종환 / 바이올린 켜는 여자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러 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

12/0215  
도종환 / 혼자 사랑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대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요 크고 작은 일들을 바쁘게 섞어 하며 그대의 손을 잡아보고 싶어요 여럿 속에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다 슬그머니 생각을 거두며 나는 이것이 사랑임을 알아요 꽃이 피기 전 단내로 뻗...

11/1012  
도종환 / 사막

마른바람이 모래언덕을 끌고 대륙을 건너는 타클라마칸 그곳만 사막이 아니다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대도 사막이다 저마다 마음을 두껍고 둔탁하게 바꾸고 여리고 어린 잎들도 마침내 가시가 되어 견디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곳 그곳도 사막이다 우리 안에도 선인장 가시 같은 것이 ...

11/0903  
도종환 / 귀뚜라미

밤을 새워 우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던 날이 있었다 나의 노래는 나의 울음 남들은 내 노래 서늘하다 했지만 나는 처절하였다 느릅나무 잎은 시나브로 초록을 지워가는데 구석지고 눅눅한 곳에서 이렇게 스러져갈 순 없어서 나의 노래는 밤새도록 울음이었다 어떤 날은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어서 ...

11/0903  
도종환 / 해인으로 가는 길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

11/0903  
도종환 / 다시 오는 봄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11/0428  
도종환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

10/0512  
도종환 /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 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 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

09/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