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나희덕 / 하느님은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 \'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 \'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 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

20/0729  
나희덕 / 캄캄한 돌

메카의 검은 돌은 원래 흰색이었다고 해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손에 움켜쥐고 나왔다는 돌, 그 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입을 맞추고 만지는 동안 그들의 고통을 빨아들여 캄캄한 돌이 되었다지요 내게도 검은 돌 하나 있어요 그 돌은 한때물속에서 아름다웠지요 오래전 해변을 ...

19/1109  
나희덕 / 우리 어머니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 전쟁고아들이 자라서 자식들을 낳고 전쟁 아닌 전쟁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까지도 여전히 그들의 따뜻한 둥지가 되어주시는 분 용달차 운전하는 길천이가 애인과 헤어져 위로 받으로 찾아오고, 시집살이가 ...

19/0307  
나희덕 / 심장을 켜는 사람들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

19/0307  
나희덕 / 천공

천공입니다, 의사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위장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낮밤을 가리지 않고 마셔대던 술일까 실패한 자의 절망감일까 유전적으로 취약한 장기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운이 나빠서였을까 의사는 내시경 사진을 보여주며 구멍의 위치를 설명했다 위장과 십이지장이 연결된 ...

19/0307  
나희덕 /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당신의 틀니가 결국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 스물여덟개의 이빨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캐스터네츠 그러나 무언가 씹을 때 들려오는 음악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요 이제 당신은 자유로워지셨군요 헌 입천장과 잇몸을 짓누르던 재갈로부터 입속에 절벅거리던 침으로부터 누대에...

19/0307  
나희덕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대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

19/0211  
나희덕 / 마지막 산책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네,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

19/0211  
나희덕 / 탄센의 노래*

! 이것은 불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져요 불은 번져가고 몸이 점점 뜨거워져요 강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노래를 불러요 강물도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뜨거워요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사랑이여, 도와줘요 비의 노래를 불러줘요 비를 불러줘요 2 이것은 비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불꽃이 ...

19/0211  
나희덕 / 남겨진 것들

올빼미가 토해낸 팰릿에는 소화 안된 털과 뼈들이 뭉쳐 있다지 밤에 먹어치운 먹이 중에는 분해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을 테니까 철사나 전선처럼 질긴 것들도 있었을 테니까 오랫동안 뭉쳐진 기억들은 점점 희고 길어진다 이미 나뭇가지의 일부가 된 마른 고치처럼 나비가 날아간 후에도 꽃이 시든...

19/0211  
나희덕 /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

19/0105  
나희덕 / 흙 속의 풍경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고 말았습니다 무릉 속의 폐허를, 사라진 이파리들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흙을 마악 뚫고 나온 눈동자가 나를 본 것은 겨울을 건너온 그 창끝에 나는 통증도 없이 눈멀었지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봄에 갔던 길을 가을에 다시 가고 말았습니다 길의 그림자가, ...

17/0703  
나희덕 / 물소리를 듣다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며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자? ......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17/0212  
나희덕 / 종이감옥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 다니며 ...

17/0124  
나희덕 /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

16/0425  
나희덕 / 나를 열어 주세요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만큼 ...

15/0926  
나희덕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

15/0308  
나희덕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15/0308  
나희덕 / 누에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

12/1227  
나희덕 / 겨울 아침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

1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