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나태주 / 말년

펜과 종이와 돋보기 쓰다가 읽다가 졸다가 말이 없다가 창 너머 먼 산 바라보며 너를 기다리다가.

21/0206  
나태주 / 돌아오는 길

점심 모임을 갖고 돌아오면서 짬짬이 시간 돌아오는 길에 들러본 집이 좋았고 만난 사람은 더 좋았다 혼자서 오래 산 사람 오래 살았지만 외로움을 잘 챙겼고 그러므로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 마주 앉아 마신 향기로운 차가 좋았고 서로 웃으며 나눈 이야기는 더욱 좋았다 우리네 일생도 그렇게 끝...

20/0729  
나태주 / 꽃을 보러 갔다가

꽃을 보러 갔다가 꽃한테 반해 꽃이 되어버린 사람, 나도 또한 그대 찾으러 갔다가 그대한테 반해 또 한 그루 꽃나무 되어 섰기로 한다.

19/0307  
나태주 / 가난

말을 아껴야지, 눈물을 아껴야지 참고 참으면 사람의 말에서도 향내가 나고 아끼고 아끼면 사람의 눈물도 포도알이 될 것이다 혼자 속삭이는 말, 돌아서서 지우는 눈물.

19/0307  
나태주 / 참말로의 사랑은

참말로의 사랑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나를 미워할 수 있는 자유를 한꺼번에 주는 일입니다 참말로의 사랑은 역시 그에게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나에게 머물 수 있는 자유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떠나지 않고 주는 일입니다 바라만 보다가...

19/0109  
나태주 / 다락방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 다락방에 꽁꽁숨으렵니다 그...

19/0109  
나태주 / 한밤중에

한밤중에 까닭없이 잠이 깨었다 우연히 방안의 화분에 눈길이 갔다 바짝 말라있는 화분 어,너였구나 네가 목말라 나를 깨웠구나.

17/0209  
나태주 / 풀꽃과 놀다

그대 만약 스스로 조그만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풀밭에 나아가 풀꽃을 만나 보시라 그대 만약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 여겨진다면 풀꽃과 눈을 포개 보시라 풀꽃이 그대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조금씩 풀꽃의  웃음과 풀꽃의 생각이 그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 부...

16/0414  
나태주 / 

집에 있을 때 밥을 많이 먹지 않는 사람도 집을 나서기만 하면 밥을 많이 먹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외로움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밥을 많이 먹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 밥은 또하나의 집이다

13/0424  
나태주 / 강아지풀에게 인사

혼자 노는 날 강아지풀한테 가 인사를 한다 안녕! 강아지풀이 사르르 꼬리를 흔든다 너도 혼자서 노는 거니? 다시 사르르 꼬리를 흔든다.

12/0506  
나태주 / 하단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강물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밀고 따르고 그런다 돌아보아 참으로 아득한 길 멀리까지 왔구나 제 몸 하나 보전하기조차 어려웠단다 그래그래 이제는 그 몸마저 버릴 때야 강물이 이마를 모으고 속삭인다 낭떠러지에서 눈 딱 감고 뛰어내려 폭포...

12/0506  
나태주 / 겨울 연가

한겨울에 하도 심심해 도로 찾아 꺼내 보는 당신의 눈썹 한 켤레. 지난 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 움쩍 못하게 얼어붙은 저승의 이빨 사이 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 간혹 매운 바람이 걸어놓고 가는 당신의 빛나는 알몸. 아무리 헤쳐도 헤쳐도 보이지 않던 그 속살...

11/1012  
나태주 / 환한 대낮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

11/0825  
나태주 / 그리움

때로 내 눈에서도 소금물이 나온다 아마도 내 눈속에는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

11/0803  
나태주 /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흰구름도 흰구름이 아니요 꽃도 꽃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새소리도 새소리가 아니요 푸른 하늘도 푸른 하늘이 아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강물도 결코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

11/0702  
나태주 / 하루에 한 두 시간

하루에 한 두 시간 길을 걷는다 하루에 한 두 시간 길바닥에 휴지 쪽이거나 돌멩이다 하루에 한 두 시간 씽씽 내달리는 차들 다만 혼자 힘들게 길을 걸어본 일이 있는 사람만 차를 세운다 차 속에 있는 사람 마음이 걸어가는 사람 마음에 가 닿았을 때만 그렇다.

10/0501  
나태주 / 졸개

이제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일도 시들해졌고 누군가를 끝없이 욕하는 일도 신물이 난지 오래, 제발 혼자가 되어야 할 일이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나무 아래 한 그루 나무로 외로워지고 하늘 아래 또 하나 하늘로 가득해지고 먼지 날리는 자갈 길 위에 오로지 고달픈 노새가 되어 고달플 일이...

09/0922  
나태주 / 부탁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09/0804  
나태주 / 단풍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빛이여 들어와 조금만 놀다 가시라 바람이여 잠시 살랑살랑 머물다 가시라.

09/0804  
나태주 / 아버지에 대하여 2

아버지는 오늘도 고추를 심고 오이를 가꾸신다. 그걸 심어 떼돈을 벌자는 게 아니고 거짓말하지 않는 건 땅밖에 없어 다만 땅하고 친하고 싶어 오늘도 아버지는 호박북을 돋구고 감자북을 돋우신다. 감초를 심으면 돈이 된다는 대처 사람들 말을 듣고 감초를 심었다가 이거 왠 걸, 밭 묵히고 ...

0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