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강은교 / 손톱꽃

고모가 잡풀을 뽑네 곁에서 나도 잡풀을 뽑네 잡풀을 뽑다가 원추리 떡잎도 같이 뽑네 고모도 1센티쯤 자란 채송화를 뽑았다고 한숨을 쉬네 뽑힌 그것들을 다시 묻어주고 함께 기도하네 살려주십사, 살아주십사, 살려주십사, 살아주십사 한 기도는 내 기도이고 또 한 기도는 고모의 기도이네 고모가 잡...

20/0729  
강은교 / 벽과 그림자의 사랑이야기

외로운 벽 하나가 있었다,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그 벽 앞으로 왔다, 여자는 벽에 기대었다, 참말로 부드러운 어깨였다, 달이 둥실 떠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깨를 펄럭이며, 뺨을 펄럭이며, 입술을 펄럭이며, 이마를 펄럭이며, 우우우 그 여자, 일어서고 있...

19/0109  
강은교 / 그 소녀

그 소녀를 또 보았다, 실에 끌려가는 아이처럼, 부끄럽게 살살살살 비단 손수건이 대리석 바닥에 쓸리듯, 꽃 무늬자수가 팔랑개비 날개에 수놓아지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밀납종 같은 젖을 달랑거리며 등뼈를 잔뜩 구부린 채, 그곳은 오른편 손으로 가리고 운명처럼 간병인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 ...

17/0212  
강은교 / 봄 無事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16/0131  
강은교 /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

16/0131  
강은교 / 헤매는 발들을 위한 노래

지나간다 집들이. 꽁꽁 언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 겨울 바람이. 어릴 때 나는 흐르는 물가에 살았다. 아침이면 웃으며 물이 나를 씻었고 밤이면 지는 해가 내 발을 따스히 덮어 주었다. 나는 걷지 않았다. 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웃음. 그러면 내 발이 나를 똑바로 세워 주었다. 지나간다...

16/0131  
강은교 / 허총가 1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

16/0131  
강은교 / 장날

장날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알사탕이 오색의 무지개를 뻗치고 있는 리어카 옆에는, 빛나는 무우 눈부신 시금치, 한 곳에 가니 물고기들이 펄떡펄떡하고 있었다, 거기 돛폭 같은 지느러미 윤기 일어서는 살에선 바다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연 눈동자가 잔뜩 기대에 차서 장날을 내다보고 ...

16/0131  
강은교 / 자전 4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不意)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뒤에는 때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

16/0131  
강은교 / 자전 2

밤마다 새로운 바다로 나간다. 바람과 햇빛의 싸움을 겨우 끝내고 항구 밖에 매어놓은 배 위에는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웃고 있는 지구 누가 낯익은 곡조의 기타를 튕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16/0131  
강은교 / 자전 1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

16/0131  
강은교 / 소리 11

여기 내리는 비에선 참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엎드려 누운 풀과 풀 사이 날개 수그린 새들은 그걸 안다. 빗방울들은 왜 저리 몸부림하는지 빗방울 겹겹 바람들 왜 저리 울어 대는지 서두르지 않아도 들려오는 종소리 끝에 목매단 어두움 자갈들은 그걸 안다. 삼천의 노을이 삼천의 구...

16/0131  
강은교 / 소리 9

눈떠야 하리 시든 꽃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 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시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녹두꽃은 녹두꽃 마른 허리를 비벼라 담장이는 흰 눈에 풀풀 감긴 머리칼을 풀어라 등에 진 땅이 무거워 엎드려 흐느끼는 ...

16/0131  
강은교 / 소리 7

그 때 노인은 바람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풍선 서넛 목매단 차양 아래 햇살은 진창길 할퀴며 달려나오고 우리는 잠시 등 뒤를 손가락으로 털었다. 목마는 얼씬대는 구름 그림자 하나 없이 쇠기둥에 매달려 안간힘 안간힘인데 개펄 노인의 뺨에선 땀방울이 헐레벌떡 모래 누운 길을 가리켰다. ...

16/0131  
강은교 / 소리 4

님이여, 아 멀리 계시는 님이여 허구헌 날 불어 대는 저 바람소리처럼 형체도 없으신 님이여 지금쯤 어느 진흙구렁을 지나시기에 어느 산 깊은 그림자에 젖은 옷깃 담그고 계시길래 지새는 밤이면 밤마다 손 닿지 않는 별빛만 보내오시고 동구 밖 시든 풀 줄거리엔 무서리 가득가득 던져 놓...

16/0131  
강은교 / 소리 1

어서 가요, 어머니 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 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 힘주어 흔들리는데. 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 이 햇빛 따라가요. 갈 곳 몰라 헤매는 저 구름덩이들과 살 틈마다 웅크려 누운...

16/0131  
강은교 / 생자매장 4

수레야 달려라, 연기가 간다 이끼 짙은 지붕마다 눈부비고 일어나 허허벌판 돌아보며 돌아보며 그리워 아주 눈감고 간다. 수레야 달려라, 구름이 간다 버릴 수 없는 사랑 빗물로 잠깐 잠깐 쏟으며 동그란 눈물산 여기저기 이루며 간다. 수레야, 아무도 뵈지 않아 수레야, 아무도 멈추지...

16/0131  
강은교 / 생자매장 3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어둠이 저를 이끌고 빛이 저를 묻으니 오 사자(死者)는 복되라 사자(死者)여 그리워라. 나 오래 여기 있었네. 먼지 길 바쁜 내 가슴 파도 늘 울리는 발의 바다, 아침에 나 벌써 저녁을 기다렸네. 저녁에 다음 아침 탐내 꿈꾸듯 ...

16/0131  
강은교 / 생자매장 2

죽어도 죽지 않는 피[血]의 소요를. 살아도 살지 않는 살[肉]의 평온을. 언제나 있는 슬픔의 언제나 없는 슬픔을.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태아(胎芽). 눈뜨고 이렇게 ...

16/0131  
강은교 / 생자매장 1

오는가, 누구 저 닳은 들 밖에서 울리지 않는 종 소리 울리며 바삐바삐 다가오는 이. 뼈의 그늘을 핥고 핥아 속속들이 어둠 빛으로 타오르면서 무한궁륭(無限穹隆) 넘고 넘어 결코 멸하지 않으면서. 추어라 불의 춤을 추어라 오는 강 오는 바람 끝없이 뒤척이는 밤 떨어진다, ...

1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