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권현영 -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종소리는 잘 빠져들게 되는 음악
받지 못한 편지의 아타까운 말줄임표

저녁과 저녁 사이
성북구의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운 좋게 종소리를 들었다
요사이 쌓인 죄가 녹아 없어지는 순간

흰 눈가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종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심장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의 죄를 내가 용서해도 된다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을 맘껏 생각할 것이다

아직 쫓기는 꿈을 꾸는 것은
수렵의 본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따뜻함을 믿는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엾은 인류는 여전히 갖고 있다

백오십 년된 식물 채집 표본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오늘의 할 일은 다 했다
머나먼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식물 채집 표본은
색감이 엷어져 있다

빛을 파묻고 시간에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나다니
다행이다, 언젠가 내게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날 수 있다니
부드러운 후각의 저녁이 와서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12월호

(November 9th 2020)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