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김열 - 여수의 잠

여수가 아니어도 좋았다 탁 트인 바닷가라면 좋았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유적처럼 떠도는 섬들과 먼 바다로 떠나는 외항선 불빛이 닿는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이라면 더 좋았다 여수행 열차표를 손에 다짐처럼 꼭 쥐었던 건 오랜 병을 알고 있는 항구를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때때로 선택은 미묘한 끌림이 아니었던가 창측 좌석에 나의 선택을 눌러 앉혔다 열차가 레일에 묶여 미끄러지면 밀린 잠들이 육지 끝으로 밀려감을 느꼈다

열차는 간이역 불빛 같은 상념을 뚫고 달려갔다

흐린간판불쓰러질듯서있는바닷가언덕여인숙
똑똑,헤픈잠에서깨어난포주같은눈빛을외면하고
쪽방을찾아올라가는생의관절들
따라온몇편의기억들방바닥에부스러기로쏟아진다
창밖불빛들하나둘지우는해풍의손길에
녹슨육지를등진한척의잠
작고환한방
달처럼구부러진잠을잡으려다놓고가는부드러운숨결들
이불한겹한겹덮으며한자락옷을벗겨내는잠
반도의알몸으로파도는계속밀려온다
푸른비늘들살결을쓸면서밀려간다

손님, 손님, 너울처럼 몸이 흔들린다 일렁이는 시야 속으로 테를 두른 모자, 승무원 서 있다 여기는 종착역입니다……아, 旅愁였다



<여수의 잠>
애지. 2007년

(March 23rd 2020)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