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한세정 - 안녕, 안나푸르나 혹은 안티푸라민

배웅은 필요 없어
다만 코끝을 마주대고 어깨를 다독여주면 돼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시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님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나를 떠난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는 여자가 있었어
퍼렇게 멍이 든 눈가엔 항상 안티푸라민이 번들거렸지
여자는 하루 종일 식당 뒷문에 쪼그리고 앉아
고등어를 구웠어
이런 일과들이 여자를 스쳐가곤 했어
잘 달궈진 석쇠 위에서 고등어의 퍼런 껍질이
곪은 종기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여자는 말없이 눈가에 안티푸라민을 덧발랐지
울음의 무늬를 기억하는 굴곡을 어루만지며

가파른 산비탈마다 멍멍한 귓속을 채우는
나귀들의 방울소리와
몸을 움츠려야만 닿을 수 있는 지상의 협곡들,
그러니까 배웅 따윈 필요 없어
난 단지 내 안의 굴곡을 벗어나
안나푸르나에 가고 싶을 뿐이야
아직도 눈가 가득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있을
내 몸 밖의 굴곡을 어루만지기 위해.



<입술의 문자>
민음사. 2013년

(March 23rd 2020)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