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류인서 - '우리'라는 말의 우리

좁게는 이것은 크기와 두께가 다른 여러 개 무늬목 판자와 철제 바구니, 작은 나사못, 스프링, 손잡이용 장식 고리, 경첩 등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장롱 같은 것이다

그럴싸한 앞면과 어수룩한 뒷면, 엇비슷한 좌우, 컴컴한 바닥과 먼지 쌓인 천장을 가졌다

이것 속에는 겉옷 속옷은 물론 양말짝, 실, 바늘, 가위, 물하마, 헌 지갑, 서류 뭉치의 잡동사니까지 다 있다

뜻하지 않은 내방객이 닥쳤을 때는 후다닥 이것으로 뛰어들어 겁 많은 사슴처럼 몸을 숨길 수도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이것의 문을 열다 바닥에 구르는 나사못 두엇을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다 녹슨 스프링을 손바닥에 주워 올릴 수도 있다

대체 어디인가, 이것 속에 머리라도 들이밀고 살피지만 부속 한둘 빠져나간 틈은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뭐 어떨라구, 보이지 않으니 아직 문제없는 것이다

그렇게 태연히 이것은 제 몫의 구실을 한다

몇 년은 더, 아니 보다 더 오랫동안이라도 삐걱삐걱 어떻게등 '관계'를 버텨주는 벽으로 서 있을 것이다



<놀이터>
문학과 지성사. 2019년

(November 9th 2019)  /  2019